"viewport" 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살고 싶다는 농담> - 허지웅 : '홀로'에서 '함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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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키우는 책

<살고 싶다는 농담> - 허지웅 : '홀로'에서 '함께'로

by grabthecloud 2020.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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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뭐든 혼자 힘으로 고아처럼 살아남아 버텼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누구에게도 도와달라는 말을 할 수 없는 멍청이가 되고 말았다. 그런 인간은 도무지 아무짝에도 쓸 데가 없는 것이다. 그런 인간은 오래 버틸 수 없다. 오래 버티지 못한 다면, 삶으로 증명해내고 싶은 것이 있어도 증명해낼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결론이 아니라 결심이다

/결론에 사로잡혀 있으면 정말 중요한 것들이 사소해진다. 결론에 매달려 있으면 속과 결이 복잡한 현실을 억지로 단순하게 조작해서 자기 결론에 끼워맞추게 된다. ... 이와 같은 생각은 정작 소중한 것들을 하찮게 보게 만든다. 이와 같은 생각은 삶을 망친다.

거창한 결론이 삶을 망친다면 사소한 결심들은 동기가 된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결심들을 잘 지켜내어 성과가 쌓이면 삶을 꾸려나가는 중요한 아이디어가 될 수도 있다.

/살면서 성실하게 노력한 만큼 공정하게 돌려받은 경험이라고는 몸을 쓰는 일밖에 없었다. 그 외에는 노력한 것보다 결과가 훨씬 더 좋거나 나빴다. 이와 같은 경험을 축적해서 쌓아나가는 일은 중요하다. 이기는 경험을 쌓으면 패배해도 주저앉아 비관하지 않고 다시 한번, 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른 무엇보다 몸을 이기는 경험을 쌓아나가자. 출발선이 다르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몸을 이기는 경험을 대신 쌓는 것이다. 이기는 경험을 쌓는다는 건 언제 힘을 주고 뺐는지, 언제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는지 근육의 쓰임과 호흡의 감각을 기억해내는 것과 같다. ... 이겨본 사람만이 다시 이길 수 있고, 지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요컨대 끝까지 버틸 수 있는 몸을 만들자는 것이다.

/요컨대 불행의 인과관계를 선명하게 규명해보겠다는 집착에는 아무런 요점도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그건 그저 또 다른 고통에 불과하다. 아니 어쩌면 삶의 가장 큰 고통일 것이다. 그러한 집착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인과관계를 창조한다.

/벌어질 일은 반드시 벌어진다. 운명 이야기가 아니다. 충분한 원인과 조건이 갖추어졌기 때문에 결국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일이라는 이야기다. 피할 수 없다.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결과를 감당하며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있는 힘껏 노력할 뿐이다.

/네가 생각하고 있는 그것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벌어질 일이 벌어진 거다. 그러니까 괜찮다. 찾을 수 없는 원인을 찾아가며 무언가를 탓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에 수습하고, 감당하고, 다음 일을 하자. 그러면 다음에 불행과 마주했을 때 조금은 더 수월하게 수습하고, 감당하고, 다음 일을 할 수 있다.

/액정보호필름을 붙이는 것과 같다. 붙이기 어렵다. 먼지가 들어가고 지문이 남는다. 그래서 지금 당장 확 떼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거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정말 망치게 된다. 미련을 버리지 못해 먼지를 빼고 지문을 지우려다 아예 구겨지고 망가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운이 좋은 아이들은 액정보호필름을 새 걸로 다시 사주는 부모가 있다. 그런 부모가 없다고 화를 내거나 아파하지 말아라. 시간 낭비다. 그냥 먼지와 지문을 참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빨리 배우면 된다. 부모가 사준 두 번째 기회를 누리는 아이들은 그런 방법을 배울 굴곡이 없다. 언젠가 알게 되겠지만, 나와 내 주변의 결점을 이해하고 인내하는 태도는 반드시 삶에서 빛을 발한다. 그걸 할 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삶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우리의 삶은 남들만큼 비범하고, 남들의 삶은 우리만큼 초라하다.

/끝까지 버틸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혼자서 살아남기 위해 몸을 만들어야 했다. 당시의 내 상황에선 맞는 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버틴다는 것이 혼자서 영영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당신 옆에 있는 그 사람은 조금도 당연하지 않다. 우리는 모두 동지가 필요하다.

/오늘도 나는 나와 다투고, 또다시 친구가 되기를 반복한다. 지치는 노릇이지만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계속될 일이다. ... 예민함은 더 많은 것에 공감할 수 있게 만들어주지만 꼭 그만큼 공연한 슬픔을 안겨주기도 한다.

/나는 이제 더이상 그렇게 뜨겁게 살지 않는다. ... 뜨거움은 삶을 소란스럽게 만들 뿐 정작 단 한 번도 채워주지 못했다.

/나는 남을 평가하는 일을 그만두었따. 평가받는 일이 얼마나 고되고 영혼을 파괴하는 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가장 멋지고 빼어난 것들 덕분이 아니라 언제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오래된 선행들 때문에 구원받을 것이다. 자기 삶이 애틋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누구나 자신이 오해받는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 관한 평가는 정확한 기준과 기록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평가하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결정된다. ... 이와 같은 현실을 두고 누군가는 자신을 향한 평가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킨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죽을힘을 다해 그걸 해낸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한다. 반면 누군가는 끝내 평가로부터 헤어나지 못하고 자신과 주변을 파괴한다.

/우리가 과거의 인생을 반복하고 있꼬 그것을 다시 영원히 반복한다는 아이디어는 끔찍한 것이다. 니체는 정확히 바로 그 공포에 맞서라고 이야기한다. 모든 것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운명론적 공포를 극복하고, 반복되더라도 좋은 만큼 모든 순간에 주체적으로 최선을 다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상관없다고, 이토록 끔찍한 삶이라도 내 것이고 외치라는 것이다. 나아가 그런 삶을 사랑하라 주문한느 것이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바로 그 순간 네 삶의 고통과 즐거움 모두를 주인의 자세로 껴안고 긍정하라는 아모르파티와 결합한다.

/천장과 싸워 이긴 자들, 그리고 바닥과 싸워 이겨본 자들만이 오직 천장과 바닥 사이에 펼쳐진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겸허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타인을 돕고 스스로를 구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위버멘쉬는 전지전능한 슈퍼맨이 아니다. 말 그대로 스스로를 극복해 나가는 인간이다.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란 자기 삶을 향한 주체적인 긍정으로부터 나온다.

/위버멘쉬란 단계가 아닌 태도에 붙여지는 이름이 아니까 싶어졌다. 고통마저 긍정하고 사랑하며 운명을 바꾸어나가는 삶이란 단 한 번의 각성이 아닌 끊임없는 다짐과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시키는 대로 주어진 대로 혹은 우리 편이 하라는 대로 따르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생각하고 의심하고 고민하는 태도만이 오직 바꿀 수 없는 것과 바꿔야 할 것을 구별할 수 있는 밝은 눈으로 이어진다.

/ 때와 장소에 맞게 알맞은 가면을 가려 쓸 줄 안다는 건 돈을 주고도 배우기 어려운 능력이다. 전혀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 앞에서 본연의 있는 그대로를 강박적으로 드러내서 오해와 구설수를 살 필요가 없다.

다만 가면을 쓴 채로 계속 살아갈 수는 없다.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아도 좋은 친구들을 만들어라. ...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가면 안의 내가 탄탄하지 못하다면 가면을 쓰든 안 쓰든 아무 차이가 없다. 비빌 구석이 필요하다.

/착한 피해자라는 말을 들여다보자. 피해자에 특정한 이미지와 표정을 덮어씌우려는 것은 한국 사회의 순결 콤플렉스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피해자에 성녀, 처녀, 가난한, 약한, 순결한 따위의 수사를 가져다 붙인다. 나쁜 피해자를 이야기 하는 사람 뿐만 아니라 착한 피해자를 이야기하는 사람도 진짜 피해자를 궁지에 몬다는 점에서 전혀 다를 게 없다.

/불행이란 설국열차 머리칸의 악당들이 아니라 열차 밖에 늘 내리고 있는 눈과 같은 것이다. 치명적이지만 언제나 함께할 수밖에 없다. 불행을 바라보는 이와 같은 태도는 낙심이나 자조, 수동적인 비관과 다르다. 오히려 삶을 주체적으로 수용하도 주도하겠다는 의지다.

/그래서 내 앞의 불행을 이기는 데 최소한의 공간적, 시간적 거리두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기 객관화가 가능하도록 마음의 여유를 가능한 빨리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평가에 잠식되어서는 안 된다. 평가와 스스로를 분리시켜야 한다. 마음에 평정심을 회복하고 객관성을 유지하자. 그것이 포스가 말하는 균형이다. 언젠가 반드시 여러분의 노력을 아아보고 고맙다고 말할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 끊임없이 가다듬고 정진하고 버틴다면 반드시 그날이 온다.

/메시아를 기다리라는 게 아니다. 누구도 우리게게 평가를 빚지지 않았다. 평가와 스스로를 분리시키라는 말은 곧 채권자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지 말라는 이야기와 같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오니" 피해의식과 결별하고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기로 결심하라는 것. 당장 지금 이 순간부터 자신의 시간을 살아내라는 것. 오직 그것만이 우리 삶에 균형과 평온을 가져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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