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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 내려간 마음

1과 2

by grabthecloud 2020.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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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는 아직도 나를 가끔 애기라고 부른다. 나 같은 팔척장신의 애기는 주몽설화에나 나온다는 것을 알지만 엄마들에게 자식이란 나이에 상관없이 영원히 애기라는 것을 알기에 굳이 정정은 하지 않는다. 한동안 우리 엄마는 그 애기 걱정을 했다. 내가 익숙하고 오래된 2의 세계와 결별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걷다가 영화표 두 장을 예매한 뒤 두 자리를 차지하고서 영화를 보고 나와 두 가지 음식과 두 잔의 음료를 나눠 먹은 뒤 일어나 두 개의 그림자로 집에 돌아가는 그런 2의 세계로부터. 나는 괜찮았지만 누가 정말 괜찮은 거냐고 물어보면 그 즉시 안 괜찮아졌던 걸 보니 사실은 안 괜찮았던 것 같다. 아니, 안 괜찮았다. 엄마 앞에서는 이것을 티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엄마는 내 숨소리만 듣고도 무슨 고민이 있는지 아는 유일무이한 사람이므로 나는 그 절대적 존재에게 내내 다 들키고 있었다.

 

 사계절을 2의 세계에서 보냈다. 계절의 다양한 증거들을 만끽하고 누리고 나누면서. 그 다음 계절 또한 당연히 그럴 줄 알았으나 예상과 달리 1의 세계로 넘어온 뒤에 얼마간은 유령처럼 지냈다. 몸은 1의 세계에 있는데, 마음은 2의 세계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채 방황했다. 분명 혼자 걷고 있는데 문득 같이 걷던 밤의 공기가 끼치면 나는 숨을 참고 걸었다. 이렇게 숨을 참다가 길을 다 걷지 못하고 호흡 곤란으로 객사하는 한이 있더라도 둘이서 걷던 기억을 떠올리기가 싫었다. 나는 그게 죽기보다 싫었다. 가뜩이나 힘든 불경기에 사장님들께는 정말 죄송하지만 2의 세계에서 갔던 곳들도 모두 망해버리길 바랐다. 한동안은 이렇게 못돼 처먹은 유령으로 지냈다. 사람들은 시간이 약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말도 그때는 안 믿었다. 시간이 약이라면 나한테만 듣지 않는 약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믿는다. 예전에는 떠오르기만 해도 속이 뒤집히면서 발기 부전이나 생겨라, 라고 저주를 했지만 이제는 그게 좀 심한 말 같아서, 그와 그가 새로 만날 그녀에게 너무나 비극 같아서, 이건 좀 과했다며 취소한다. 시간은 약이다.

 

 며칠 전, 원래는 압정을 찾으려던 거였는데 기념일에 같이 찍은 흑백사진을 찾아버렸다. 버리는 것도 버거워서 나중으로 미루고 처박아 두었던 것들. 그걸 보면 그 날 혜화동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떠올리고 쓸데없이 좋은 내 기억력을 탓하다가 잠깐 동안은 속절없이 멍해지던 날들로부터 나는 줄곧 도망쳐왔다. 하지만 이번엔 그러지 않기로 했다. 유통기한이 지난 마음들은 폐기해야 한다. 연애의 유류품들. 바퀴벌레처럼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이것들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 작정하고 그동안 못 버리고 있던 편지들과 책, 티켓, 인형, 선물 받은 목걸이와 같이 만든 팔찌도 꺼냈다. 사랑이 죽을 때에 사랑으로 주고받았던 물건들까지 함께 사라져버리면 참 편할 텐데. 이렇게 내가 일일이 분리수거 고려해가며 갈갈이 찢어 없애야 한다니. 2의 세계는 환상의 나라인 듯 시작해서 환멸의 나라로 변한다는 것을, 그곳의 마지막이란 대개가 이렇게 지긋지긋했다는 것을 상기한다. 정리를 끝내고서 사실 내 고향은 1의 세계고 2의 세계는 여행지였다는 생각을 한다. 2가 주는 안락함에 취해 너무 오래 머물러 버렸지만 여행은 여행이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겨두고 미련 없이 이번엔 제대로 돌아가자, 1의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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