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port" 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사랑의 생애> - 이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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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키우는 책

<사랑의 생애> - 이승우

by grabthecloud 2020.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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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들 사랑을 ‘한다’고 하지만 나는 몇 번의 사랑을 거친 뒤에 알게 되었다. 사랑은 내가 하는 것일 수 없단 걸. 시작도 끝도 내 맘대로 안 된다는 걸. 더구나 이 사랑이란 걸 둘이 할 때 비극은 더 자주 더 많이 일어난다는 걸. 사랑은 참 하면 할수록 어렵고 하면 할수록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몇 번의 연애를 했지만 사랑의 어느 것 하나 일반화할 수 없었다. 사랑 앞에서 나는 어쩔 수가 없었다. 자주 당황했고 그래서 방황했다. 사랑이란 이름 아래에서 수만 갈래 길을 헤맸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 하니, 나는 사랑을 알고 사랑을 이기고 싶어 이 책을 읽었다. 하지만 내가 확인한 것은 내가 앞으로도 사랑 앞에서 계속 패배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랑은 나를 두고 백전백승할 것이다. 사랑이니까 그렇다. 사랑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 책을 다 덮고서 사랑으로부터 상처받은 내가, 사랑이 무서워져 그로부터 도망친 내가, 그래서 현재 사랑을 하고 있지 않은 내가 보였다. 사랑을 분석하고 이해한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시도였다. 사랑을 알려고 하는 대신 사랑을 하려고 하면 된다. 내가 사랑 그자체가 되면 된다. 이것이 더 쉽다.

 책을 읽는 내내 이 책과 맥을 같이 하는 시가 떠올랐다. 장석남 시인의 ‘배를 매며’라는 시이다.

 

배를 매며 -장석남

 

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나는

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는 멀리서부터 닿는다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우연히

별 그럴일도 없으면서 넋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어찌할 수없이

배를 매게 되는 것

 

잔잔한 바닷물 위에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떠 있는 배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을 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일 뿐이고, 사랑이 그 안에서 제 목숨을 이어간다는 뜻으로 ‘사랑의 생애’라고 했다.

 

-그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다른 사람과 다를 뿐 아니라 사랑하기 전의 자기와도 같지 않다.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들에게 필요한 첫 번째 요소는, 모르는 사람을 만나거나 이미 아는 상대를 모르는 사람으로 인식하는 일일 것이다.

 

-그는 인정하고 싶지 않을지 모르지만, 거의 온종일 한 사람만을 생각하는 것은 사건이다. 큰 사건이다. 그는 사랑에 걸렸다.

 

-그는 자기 가슴속에 그녀가 가득 차서 거의 자기 자신이 그녀로 이루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는데, 그렇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거처를 제공했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이 그의 내부에서 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사랑은 덮친다. 덮치는 것이 사랑의 속성이다. 사랑하는 자는 자기 속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하는 어떤 사람, 즉 사랑을 속수무책으로 겪어야 한다.

 

-파스타라는 기호

 

-사랑하는 자의 말은 불가피하게 우회하는 말이다. 사랑의 말은 직선을 모른다. 아니, 모르지는 않지만 쓰지 못한다. 쓰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두근거림과 조심스러움, 즉 수줍음이 쓰지 못하게 한다.

 

-그렇다면 사랑에 붙들리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일이 위험한 일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사랑에 대해 더 진지하다. 더 진지하기 때문에 함부로 하지 않는다.

 

-내가 키스를 하자는 거야? 사랑을 하자는 거지, 라고 그는 항의했다. 키스를 하자는 거잖아요, 라고 그녀가 대들었다. 키스 하는 게 사랑하는 거지, 라고 그가 말하고, 키스하는 게 키스하는 거지, 어떻게 사랑하는 거에요, 라고 그녀가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키스하는 건 아주아주 자연스러운 거야, 하고 그가 말하고, 자연스러운 건지 몰라도 당연한 건 아니지요, 라고 그녀가 말했다.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는 것, ‘사랑하기’라는 기적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이 사랑하게 한다.

 

-의도를 넘어서는 표현들, 동기와 상관없는 결과들, 원문에서 달아나는 번역들이 삶에 신비를 더한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녀를 이끈 것은 그 남자의 약함, 보잘것없음이었다.

 

-에로틱한 것들은 실은 에로틱하지 않다. 에로틱하지 않고 안쓰럽다.

 

-사랑이 괴로울 수밖에 없는 것은 사랑이 불가능한 것을 욕망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시작한 사람이 욕망하는 것은 연인의 마음이다. … 그런데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걸 가질 방법은 없다. 누구에게도 그런 능력은 없다. … 사랑이 시작되면 그걸 가질 수 없다는 걸 모르게 된다. 잘 알다가도 갑자기 모르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걸 모르는 게 된 사람이다.

 

-당신이 누군가를 만날 때, 그 사람을 만나기 전에도 그 또는 그녀는 자신의 삶을 살며 자기의 스토리를 만들어왔지만, 그 스토리에 당신이 참여해 있지 않으므로, 당신에게 그 사람은 이제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간주해야 한다.

 

-배려는 이기심을 넘지 못한다. 배려보다 이기심이 더 큰 사랑의 증거로 간주된다. 사랑하기 때문에 떠난다는 수사가 이 세계에서 위선과 변명의 표현으로 인식되는 이유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떠나는 사람은 사랑하기 때문에 파멸에 이르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 자기는 물론 연인의 파멸조차 감내하는 극한의 이기심을 사랑은 요구한다. 그, 또는 그녀가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사랑이 이기적인 것이다.

 

-바른 해석은, 사람이 사랑을 이기지 못한다, 이다.

 

-연약한 새끼 고양이를 예로 들면서 했던, 연민이나 동정에서 비롯한 관계가 사랑일 수 없다는 그의 주장은 분명한 착오이다. 그는 약한 것이 사랑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그것보다 더 큰 잘못은, 사랑에 이르는 수없이 많은 길들에 대해 숙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랑은 어디서 오는가? 어떤 길로 오는가? 혼자 오는가, 누구와 함께 오는가? 말할 수 없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여기로 오는 길들이 하나나 둘이 아니기 때문이고, 패턴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 다르기 때문이다. 어느 길로든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길이 옳고 어느 길이 그르다고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사랑 아닌 것이 사랑으로 가는 길이 된다.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은, 사랑을 겪고 있기 때문에, 사랑이 그의 몸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즉 그가 곧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이 무엇인지 물을 이유가 없다.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사랑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진정으로 살지 않는 자가 삶이 무엇인지 묻는다. 참으로 사랑하지 않는 자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을 하고’ 사랑을 하는 것이다. 정의 내리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그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어떻게 해도 정의되지 않는 것이 신이고 삶이고 사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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