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port" 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주어의 확장은 곧 세계의 확장, 이슬아 칼럼집 <날씨와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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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키우는 책

주어의 확장은 곧 세계의 확장, 이슬아 칼럼집 <날씨와 얼굴>

by grabthecloud 2023.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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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 작가님의 글을 읽으면 신기하게도 여러가지 수업 아이디어를 얻게 된다. 교수학습방법을 익히기 위해 작가님의 글을 읽는 것이 전혀 아닌데도 그렇다. 아마도 그 이유는 이슬아 작가님이 배울 점이 많은 좋은 어른이고, 작가님의 지향과 가치관이 바른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 역시 작가님이 걷는 길로 함께 걷고 싶고 아이들에게 이런 길이 있다고 알려주고 싶다. 다양한 정보가 쏟아지지만 그렇게 방대한 정보가 주로 어느 한 쪽만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란 사살일 잊지 않고 내가 보고 듣는 것을 더 촘촘하게 걸러내야겠단 생각이 든다. 내가 보는 것이 내가 되지 않으려면 나는 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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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수업에서 나는 우리 모두가 얼마나 굉장한 개인인지를 가르치곤 한다. 개인이 소비하지 않기로 한 선택들이 모여 기업과 정치와 과학을 들썩들썩 움직인다는 믿음을 학생들에게 쥐여준다. 자신의 선택이 모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믿음이 자아도취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보다 나쁜 건 자신의 선택이 아무한테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믿는 자기기만이다. 전지구인의 총동원이 필요한 이 시대에, 당신은 어떤 것을 그만두고 싶은지 궁금하다. 고기 먹기를 일단 멈춘 동지로서 당신을 기다리겠다. 나에게 없는 지혜가 당신에게 있을 것이다. 우리는 분명 서로에게 배울 수 있을 것이다.

36/

“사람은 원래 안 변해.”

그러자 한 아이가 울면서 이렇게 소리친다.

“왜 안 변하는데? 안 변할 거면 왜 살아 있는데?”

이 대사는 자주 내 맘속에 맴돈다. 나는 사람이 타고난 기질을 대단히 배반하며 달라지는 경우는 드물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크고 작은 변화를 겪으며 계속해서 새로워지는 게 삶이라고도 생각한다. 복희와 나는 어쨌거나 누군가를 덜 착취하는 방식으로 식단을 바꾸고 싶었다.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하지 않는 생활이 얼마나 만족스러울지 혹은 얼마나 불편할지 알아보는 과정이었다. 복희는 변화를 가볍게 받아들였다. 나에 대한 사랑과 동물에 대한 어렴풋한 연결감은 변치 않을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부분은 과감히 변할 수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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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고기라니, 너무 이상한 말이다. 식재료가 되기 이전과 이후의 이름을 굳이 다르게 부르는 경우가 있던가. 양파는 팔리기 전에도 양파라 불리고 땅속에서도 감자는 감자이며 바닷속에서도 미역은 미역이다. 그러나 돼지나 소나 닭은 식재료가 되고 나면 이름 뒤에 고기라는 말이 붙는다. […]

“돼지를 먹는다”보다 “돼지고기를 먹는다”가 더 고급 문장으로 취급되는 이유는 그 말이 당장의 식사가 실제로 살아 있던 동물의 사체를 먹는 야만적 행위와 완전히 일치한다는 사실을, 그들로부터 비롯되는 근원적인 양심의 가책을 지우기 때문이다. “고기를 먹는다”는 문장 속에는 오로지 먹기 위해 동물을 탄생시키고 고통 속에 살게 하다 죽인 뒤 가공하는 과정 모두가 은폐되어 있다. 고기라는 단어 자체가 도축의 현장으로부터 인간의 눈을 가리고 동물의 피 냄새로부터 인간의 코를 막기 위해 존재하는 말이라는 것. 고기에는 동물이 부재한다.“

129/

장혜영 의원이 시작한' #내가이제쓰지않는말들’은 이 시대에 통용된 차별과 배제의 언어를 인지하고 수정하는 프로젝트다. ‘부모’ 역시 이 프로젝트가 고민하는 단어다. 엄마만 있는 경우, 아빠만 있는 경우, 둘 다 없는 경우, 엄마가 여럿이거나 아빠가 여럿인 경우, 보호자의 성별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싶지 않은 경우 등을 예외로 두는 단어다.

프랑스의 가족관계 문서는 '부/모’ 말고 '보호자 1, 보호자2’를 적게끔 한다. 부모가 모두의 기본값은 아니라는 점을 존중하는 문서 형식이다. 현재의 상상력으로는 ‘부모’ 대신 ‘보호자’ 혹은 ‘어른’이라는 말을 일상어로 쓰는 것이 최선처럼 느껴진다. 미래에는 더 적절한 말을 발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177/

담의 친구이자 엄살원 직원인 유리는 자신의 책 『눈물에는 체력이 녹아있어』에 다음과 같은 문장을 썼다.

남자를 싫어하는 일보다 선행돼야 할 건 언제나 여자를 살리는 일이고, 그런 여자들에게 그런 남자들을 거부할 자유를 주는 방법은 안 그런 여자들이 그런 남자들보다 더 그런 여자를 사랑해버리는 거, 그거 하나뿐이다. 더 환호하고 더 욕망하고 더 열렬히 사랑하는 거. 침 흘리는 남자들보다 먼저 그 여자들을 약탈하고 자기 집으로 데려가는 거. 그런 걸 안하면서 남자들이 문제다, 저런 남자를 받아주는 저런 여자도 좀 더럽다고 말하는 건 거의 그 남자랑 그 여자가 백년해로 하라고 맺어주는 거나 다름없다.

183/

나의 동료 작가 안담은 “필연적으로 비거니즘은 실패와 용서의 장르”라고 말하며 다음과 같은 문장을 썼다.

더 이상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선언이 급진적이고적극적인 실천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언제나 이상하게 느껴진다. 비건은 이미 결정했기 때문에 되는게 아니라, 아직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되는 게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비거니즘은 식물 먹기가 아니고 동물 먹지 않기이다. 그들은 무언갈 하는 게 아니고, 도리어 하지 않는다. 비건은 결정을 보류하고판단을 중지한다. 그들은 내일 뭘 먹어야 할지 확신하는 사람들이기보다는, 어제 먹은 것을 되새김질하고 오늘 먹을 것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우유부단한 사람들에 가깝다. 아마도 내내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친구의 표정이, 친구인 개의 표정이, 친구인 개의 친구의 표정이, 그의 마음속에서 모래알처럼 자분자분 씹히기 때문에.*

(* #관악여성주의비평동인 창간한 잡지 『OFF』(#off-magazine.net)의 특집호 ‘기획의말'의 일부다. 『#OFF』는 촘촘하고 짜릿한 글들이 잔뜩 모여 있어서 어지러울정도로 멋진 웹진인데 죄다 무료로 읽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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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종강 수업에서 나는 칠판에 다음과 같은 문장을 적었다. 김행숙 시인의 시 눈과 눈」의 한 구절이었다.

너는 눈이 좋구나, 조심하렴, 더 많이 보는 눈은 비밀을 가지게 된다

아이들은 내가 쓴 문장을 받아 적었다. 나는 말했다. 더 많이 보는 사람의 황홀과 고통에 대해. 그리고 비밀을 가진 사람의 불안과 아름다움에 대해. 우리를 괴롭히는 동시에 구원하기도 할 다양한 비밀들에 대해. 부디 글쓰기라는 작업이, 그 비밀을 혼자 품느라 너무 크게 다치지 않도록 도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시 못 볼 수도 있는 아이들에게 하나의 이야기만을 전해야 한다면 이 말을 하고 싶었다. 글쓰기를 통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는 말. 그러다 보면 더 많은 걸 수호할 수도 있게 된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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