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port" 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흔들리며 피는 꽃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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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 내려간 마음

흔들리며 피는 꽃신

by grabthecloud 2020.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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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6

 

 ‘***’으로 23년째 살고 있다. 지금껏 살아온 이 시간에 대해 자서전을 쓴다면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내 인생을 관통하는 몇 가지의 기념비적인 사건과 만남, 인물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나의 20대를 처음부터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는, 앞으로 남은 20대 역시 함께할 가능성이 농후해 보이는 남자와의 1110일에 대해 쓰기로 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라의 부름으로 인해 생긴 735일간의 공백과 기다림에 대한 이야기다. 이 2년은 나의 자서전 ‘제 3장 – 내가 고무신이 될 줄 나인들 알았겠니?’에 실려 오롯이 하나의 소주제를 독차지하기에 충분하다. 피할 수 있다면 온 힘을 다해 피하고 싶던, 하지만 그럴 수 없어서 온 몸으로 감당해야 했던 ‘고무신’ 생활은 지긋지긋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정말 지극한 것이었다.

 고무신이 된 후 사람들이 자주 묻는다.
“기다리면서 언제가 제일 슬펐어?”
 나는 고민 없이 답한다.
“입대 전 날.”

 

 그 날은 일명 ‘바리깡’이란 무자비한 물건으로 내일 입대하는 남자의 뒤통수를 손수 밀어본 날이고, 머리를 다 밀고 빡빡이가 된 남자를 처음 본 날이고, 그 빡빡이와 팔짱을 끼고 신촌 거리를 활보해야 했던 날이었다. 머리카락들이 주인 속도 모르고 한 움큼씩 미련 없이 잘려 나갈 때 거울에 비친 그의 표정이란. 마치 머리카락이 조국이었던 사람 같았다. 내 남자친구라서가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 강한 연민이 들었다. 나라 잃은 얼굴을 하고서 내일 나라의 품에 안겨야 하는 이 남자에게. 그렇게 일주일을 눈물로 보냈다. 공연히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그동안 주고 받았던 메신저 대화들에 기대 간신히 마음을 달래다가 또 울컥, 범람하는 눈물 속에서 한참을 헤엄치다 잠들었다. 이 때 내가 깨달은 것은 ‘나는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구나’였다. 이제껏 혼자서 밥을 먹거나, 영화를 보거나, 쇼핑을 하거나, 놀러 가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모든 시간을 함께 했고 그렇게 일상의 전부를 공유하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지니 그와 함께 내 일상도 절반이 숭덩, 사라진 느낌이었다. 무채색의 나날을 보냈다. 할 수 있는 것은 매일 눈물 반 잉크 반으로 편지를 쓰는 것뿐. 하지만 역시 인간은 만물의 영장, 적응의 동물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닫게 된다. ‘나는 적응을 잘하는구나!’

 

 남자친구를 잃은 슬픔은 열흘 정도 갔다. 나는 잘 살았다. 고무신의 좋은 점도 발견하기 시작했다. 첫째, 내 시간이 많아진다. 나는 이 시간을 활용해 손에서 놓았던 책도 다시 읽었고, 동아리도 시작했으며, 과외도 하나 더 했다. 둘째, 아날로그 감성이 되살아난다. 현대 사회 젊은이들이 하는 보통의 연애에서 가능한 ‘즉시성’은 모두 사라지기 때문이다. 시대에서 조금 빗겨난 듯 보이는 이 ‘옛날 감성’은 군화와 고무신에게 필연적이다. 예를 들면 나는 이 만원어치 우표를 사고, 점심메뉴 고민하듯 편지지를 고르고, 매일 우체통을 확인하고, 일주일 전에 보낸 내용에 대한 답을 일주일 후에 받고, 전화가 오기로 한 날은 손에서 핸드폰을 놓지 않고, 제한된 공간에서 제한된 시간만 남자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현대인이 굳이 경험할 필요도 없고, 억지로 경험하기도 힘든 것들이었다. 좋게 말하면 ‘느림의 미학’, 솔직히 말하면 ‘사람 똥줄 태우는 시간’이다. 그러나 어찌됐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여기서 피어난 애틋함과 간절함이 우리 관계의 윤활유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있을 때 잘할 걸'이라는 후회가 이별 후에 찾아왔다면 아픈데 어디에 박힌 줄 몰라 뺄 수 없는 가시 같겠지만, 다시 만난다는 것을 전제로 찾아왔다면 후회 없이 사랑할 수 있는 약이 되기 때문이다. 군대가 처방해준 이 약의 약발이 꽤 오래갔다.

 

 하지만 약발이라는 것은 언젠가 사라지기 마련이다. 나는 점점 지쳐갔다. 의례적인 통화가 지겨워졌고, 휴가 나오기 이틀 전에 휴가가 밀렸다는 사실을 통보받는 것도 짜증났고, 그러다가 정작 내가 제일 바쁠 때 휴가를 나와서 내 계획이 흐트러지는 것도 참을 수 없었고, 저녁을 무슨 라면으로 때울지 고민했다는 소리도 듣기 싫었다. 그 때부터 곧 들이닥칠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역하면 나는 4학년에 곧 졸업인데 남자친구는 고작 2학년이다. 전역해 어디로 여행을 갈지, 무슨 운동을 시작할지 고민하는 혈기왕성 대학생과 나 사이의 차이가 차갑게 와 닿았다. 이래서 헤어지나,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고개를 쳐들고 있을 즈음, 남자친구는 휴가를 나왔고 감정을 숨기는 데는 아무런 짝에도 쓸모가 없는 내 얼굴이 그동안 말하지 않은 모든 것을 말했다. ‘우리는 오히려 함께 있으면 방해가 될 거야.’

 

 그 날 우리 둘은 한 자리에 머물러 오래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는 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커다란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만 힘들고, 나만 희생하고 있다고, 내가 모든 짐을 짊어지고서 춘향이 버금가는 지조와 절개를 지키고 있으니 우리 사이가 유지되는 거라고. 그러나 돌이켜보면 남자친구 역시 자기의 신분과 처지에서 항상 최선을 다했다. 매일 전화 한 통 걸기 위해 밤낮 가리지 않고 30분씩 줄을 섰고, 여름엔 사우나고 겨울엔 살얼음판인 야외 공중전화 부스에서도 늘 먼저 수화기를 놓지 않았다. 누가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난 건 처음이라면서 당황스러워 했고, 못 해준 것만 생각나서 잠이 안 온 것도 처음이라면서 마음 아파했다. 보급으로 받은 건빵 속의 별사탕을 안 먹고 편지에 넣어서 보냈다가 반송을 당해 호되게 혼이 났다고 했고, 휴가를 나와서도 늘 나와 제일 먼저, 제일 많이 만났다. 우리가 잘 사귀고 있는 건 나만 잘해서가 아니었다. 이건 누가 누굴 기다려주는 문제가 아니다. 스무 살부터 만나 사랑하고 있는 우리 연애의 또 다른 모습일 뿐.

 

 내 남자친구는 다음 주 수요일, 5월 25일에 전역한다. 이 소식을 들은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벌써?”
 나는 정색하고 답한다.
 “‘벌써’라니?”

 

 하지만 생각해보면 나에게도 ‘벌써' 2년이다. 아주 고맙게도 예상보다 빠르게 2년이 흘러가 주었다. 생경한 감정들 속에서 이리 저리 휩쓸리며 나는 많이 흔들렸지만, 꽃 중에 꽃은 역시 ‘흔들리며 피는 꽃’ 아닌가. ‘검정 고무신’에서 ‘흔들리며 피는 꽃신’으로의 진화가 딱 일주일 남았다. 사실 남녀 사이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라, 이 난리법석을 피우고서 헤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군대 괜히 기다렸어’라는 후회는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시간 덕에 이제 혼자 밥도 먹고, 혼자 쇼핑도 하고, 혼자 영화관에 가서 영화도 본다. 함께한 시간보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더 많았기 때문에 이제는 ‘같이’의 소중함도 알고, ‘혼자’의 힘도 안다. 앞으로 내게 펼쳐질 삶과, 미지로 남아 있는 자서전의 나머지는 분명 이 2년으로 인해 달라질 것이다. 입대일로부터 벌써 2년이 흐른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와 다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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