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22
네가 지금 부모를 원망할 수는 있어. 원망하는 그 시간은 어디 안 가고 다 네 거야. 그런 걸 많이 품고 살수록 병이 든다. 병이 별 게 아니야. 걸신처럼 시간을 닥치는 대로 잡아 먹는 게 다 병이지.
p.52
그 정도 후회는 매일 하고 살아요. 후회를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고요.
p.63
'그런 일로 그렇게 오래 누워 있으면 안 된다'고 했다. '아이는 또 가지면 된다'고 말했다. '아이를 가진다'는 말은 이상했다. 아이를 또 가진다는 말은 더 이상했다. 나는 내가 죽는 상상을 했다. 내가 또 태어날 수 있나? 엄마가 아이를 가지면 그게 다시 나일 수 있나? 우리의 천사는 오직 한 명 뿐이다.
p.87
내가 엄마 아빠와 떨어져서 산다는 걸 안 다음부터 한수가 일부러 자기 가족 이야기를 피한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도 모욕감 비슷한 걸 느꼈다. 나는 나의 불쾌감이 당혹스러웠다. 배려하는 마음일 텐데 어째서 나는 상처받는가. 하지만 그런 순간은 이후에도 꽤 있었다. 어떤 친절은 내 사정을 돌아보게 했고 나를 아프게 했다.
p.90
아무튼 모욕적인 순간은 많았다. 어떤 일을 겪고 한참 지난 뒤에야 그때 내가 느껴야 했던 건 부끄러움도 자책도 아닌 모욕감이었다고 되짚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모욕감은 남한테서만 받는 게 아니라는 것, 내가 나를 모욕하는 순간도 있다는 것을 이제 나는 안다.
p.95
김선우의 단단한 자아를 견딜 수 없다. 너무 단단해서 상처받을 줄 모르는 사람. 그는 부족함을 몰라서 부족한 것이 없다. 잘못을 몰라서 잘못한 것이 없다. 자기를 너무 사랑해서 나를 사랑하는 김선우.
p.96
오늘 퇴근하면서 남지하는 말했다. 돈을 벌어야 살지만 돈만 벌면서 살 수는 없지 않나요? 선배, 여기는 정말 너무합니다.
나는 웃었다. 남지하는 웃지 않았다. 웃지 않는 연습을 해야 한다.
p.99
살아갈 날보다 내가 분명히 살아온 지난날이 너무 아까워. 겨우 이렇게 되려고 그렇게.
아무도 내가 될 수 없고 나도 남이 될 수 없다. 내가 될 수 있는 건 나뿐이다. 자칫하면 나조차 될 수 없다.
p.153
집으로 오는 길에 내가 떠올린 김선우는 우리 사이가 좋았던 때의 김선우였다. 우리는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 내가 그리워하는 건 김선우가 아니다. 어떤 시절일 뿐이다.
p.181
나의 문제집에 자기를 형편없는 사람이라 쓰고 그것을 지우는 엄마는 무척 추워보였다. 나도 나를 형편없다고 생각할 때가 아주 많지만 엄마에게 그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럴 수는 없다. 그런데 엄마는 했다. 해 놓고 후회하듯 지웠다. 엄마는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서투르고 나약한 사람인지도 몰라.
그렇다면 기꺼이 엄마의 핑계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내 핑계를 대고 잘 지내면 좋겠다고.
p.210
같은 다짐을 계속하며 우리는 어른이 되겠지. 남들은 절대 알지 못할 하루와 마음을 끌어 안으며. 중요한 말일수록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하겠다는 생각보다는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면서.
작가의 말
'나는 한 명뿐'이라고 생각하면 막막하다. 이 삶을 혼자서 책임져야 한단 말인가? 그럴 때 여러 나이의 나를 떠올린다. 스스로가 너무 못마땅해서 끈적끈적하고 희뿌연 기분에 잠겨 버릴 때는,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와 공존한다고 생각한다. 여기 나는 무겁게 지쳐 있으나 거기 나는 상심을 털어 내고 웃고 있구나. 이런 상상을 하다 보면 힘이 난다. 책임감이 조금씩 단단해진다.
멀티버스를 소재로 한 다양한 창작물이 있다. 모두가 알만 한 영화 #어벤져스 #에브리띵에브리웨어올앳원스 나 책 #미드나잇라이브러리 역시 모두 멀티버스가 기본 세계관이었다. 멀티버스에 사람들이 열광하기 시작한 이유는 뭘까? 그리고 나는 왜 멀티버스를 좋아할까? 내가 아는 내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 지금 나말고 다른 버전의 내가 존재한다는 가능성이 '지금, 여기'의 나를 견딜 수 있게 해서일까. 그런데 이건 같은 이유로 지옥이 되기도 하지 않나? 이 책은 그 멀티버스의 조금 다른 버전이다. 지금 여기의 내가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의 내가 공존한다는 것. 이것은 뭐랄까 내가 자각하는 나에게 조금 힘을 준다. 오늘의 내가 되기 위해서 과거의 내가 무던히 애썼던 기억이나, 미래 어느 곳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누리고 이뤘을 나의 모습을 상상하면 말이다. 현재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고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에게 빚지지 않아야 겠다는 다짐이 생기기도 한다. 나는 결국 내가 된다.
'나를 키우는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세랑 미니픽션 <아라의 소설>, 엽편소설집이 가진 매력 (1) | 2023.05.06 |
---|---|
행복해지는 방법 <하버드대 행복학 강의 해피어> (1) | 2023.05.03 |
제대로된 스승이 필요한 당신에게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0) | 2023.03.05 |
<인생에 한 번은 나를 위해 철학할 것> 당신의 고민에 대한 철학적 대답! (0) | 2023.02.20 |
<명상하는 뇌> 당신이 명상을 해야 하는 이유 (0) | 2023.02.1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