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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윤은 모르고 나만 아는 자격지심을 품은 채 굳은 표정으로 검사를 하던 어느날, 옆에서 그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해 미안해 하지 마~ 내가 초라해지잖아~" ... 하지만 나는 그 순간이 끝나기도 전에 그리워졌다. 머지않은 미래에는 채윤이 그렇게 노래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눈치보지 않고 노래를 부르는 어른은 드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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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너는 이제부터 더 깊고 좋은 글을 쓸 거야. 하지만 마음 아플 일이 더 많아질 거야. 더 많은 게 보이니까. 보이면 헤아리게 되니까.' 속으로만 생각한다. 그래도 살아갈 만한 삶이라고, 태어나서 좋은 세상이라고 학생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런 세상의 일부인 교사가 되고 싶다.
p.66
가끔 엄마에게 혼나고 혼자 있을 때면 이런 노래르르 부른다. "어차피 화해할 인생~ 엄마는 나를 좋아하니까 밤이 되면 괜찮아지겠지~"하며 나 자신을 위로한다.
어떤 태평함과 담담함이 양휘모의 문장에서 느껴진다. ... 그는 여러 번의 반복을 통해 알고 있는 듯하다. 낮에는 싸웠던 우리지만 밤이 오면 화해하게 될 거라고. 왜냐하면 엄마는 나를 좋아하니까. 나 또한 엄마를 좋아하니까. 사랑의 확신 때문에 그는 자신을 위로하는 노래도 지어 부를 수 있다. "어차피 화해할 인생"이라는 가사를 쓰는 건 그가 지금의 속상함에 매몰되지 않고 앞날을 내다보는 사람이라는 증거다. 양휘모가 한살 한살 자라날수록 그를 무너뜨릴 수 없는 문제들이 더 많아지기를 나는 소망한다.
p.67
나사는 아는 듯하다. 관계가 회복되어도 떄로는 상처 부위가 아주 말끔히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상대방이 "나와 다른 마음일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 그의 문장을 잊지 않고 싶다. 그 가능성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다음 문제도 성숙하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p.137
아이들은 글을 쓰기 시작한다. 종이 위에서 자기만의 표정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 표정 떄문에 같은 하루를 보내고 나서도 서로 다른 일기를 쓴다. 그들의 글투를 발견하고 수호하고 추가하는 것이 글쓰기 교사의 의무 중 하나일 것이다.
p.143
동물을 가장 많이 귀여워하는 시대이자 동물을 가장 많이 먹는 시대를 살고 있다. 외면하는 능력은 자동으로 길러지는 반면, 직면하는 능력은 애를 써서 훈련해야 얻어지기도 한다. 무엇을 보지 않을 것인가. 무엇을 볼 것인가. 스스로에게 그리고 아이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미하며 수업에서 나온다.
p.153
그들 앞에서 생각 없이 해온 말들을 되감기했다. 그들이 통과하는 시절은 내가 이미 거쳐본 것이라고 섣불리 판단하며, 나보다 어리다고 긴장을 풀기도 했고, 불건전한 말들도 툭툭 내뱉으며, 얼마나 자주 경솔했는지 모른다.
p.165
"재능을 운명으로 연결해가길."
어딘의 그 말을 마음속에서 굴리며 10대를 보냈다. 재능, 운명, 연결이라는 세 단어가 나란히 놓인 거창한 문장을 잊지 않고 지냈다. ... 누군가가 나의 무언가를 재능이라고 말해주어서 그것을 덥석 믿어버리고 싶었다. 꼭 운명인 것처럼 만들고 싶었다.
p.173
쉼보르스카는 말했다. 자기가 쓰는 시의 유일한 자양분은 그리움이라고. 그리하여 돌아가야만 한다고. ㅐ그리워하려면 멀리 있어야 하니까. 그렇다면 작가는 어떤 일이 멀어지는 걸 보며 계속 살아가는 사람 아닐까. 멀어지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들을 기록하며, 그리움을 그리움으로 두며, 하지만 결코 디테일을 잊지 않으면서.
p.179
내가 나여서 그 자체로 너무 충분하고 행복하기만 한 사람은 타인의 사랑에 굳이 응답하지 않아도 평안할 것이다. 사랑은 상대에게 없는 것과 나에게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면서 시작되기도 하니까.
p.199
솔직함과 글의 완성도는 상관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솔직하지만 별로인 문장들을 많이 읽었기 때문이다. ... 어떤 솔직함은 끔찍했다. 비린내 나는 솔직함도 있었다. 솔직함을 최대 장점으로 내세우는 글에 관심이 없어지고 말았다. 솔직한 게 어려워서가 아니라 지루해서였다. 위험하기도 했다. 모두가 서로의 마음을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면 이 세상은 더 지옥 같을 게 분명했다.
p.200-201
스물세 살에 글쓰기 교사로 일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뭘 가르쳐야 할지는 몰랐지만 한 가지는 알 것 같았다. 첫번째 사명은 '궁금해하기'였다. 나를 찾아온 아이들에 대한 따뜻한 호기심이 교사의 자격을 겨우 부여했다. ... 이 시절에 내가 보낸 사랑과 용기가 20대 이후 한 사람이 혹독한 작가생활을 견디는 밑천의 일부가 될지도 모르기 떄문이다. 꼭 작가가 되지 않더라도 어떤 밑천이 될 것은 분명했다. 탄련 있는 마음을 구성하는 밑천 같은 것. 상처받지 않는 마음 말고 상처받더라도 곧 회복하는 마음, 고무줄처럼 탱탱한 그 마음을 구성하는 밑천 같은 것.
p.201
나는 글을 검사하다가 자주 균형을 잃는, 집에 돌아오며 자주 후회하는 글쓰기 교사가 되었다. 실수 없이 하는 건 궁금해하는 일뿐이다. 네 인생의 어느 하루가 다르다면 그것은 왜냐고 물어보는 일뿐이다. 뵤여줄 수 있는 일기를 쓴날들이 쌓이면 언젠가는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일기를 쓰게 될 테니까. 보여줄 수 없는 일기를 쓴 날들이 쌓이고 또 쌓이면 다시 모두에게 보여줄 수 있는 글을 완성하게 될 테니까.
p.206
일일이 해명하거나 응답하는 대신 내 글을 고친다. 그리고 새로 쓴다. 다시 잘해보겠다고 다짐하여 움직일 수밖에 없다. 몸과 마음과 시간을 들여 새롭게 애쓸 각오를 하면 해명의 말을 꾹 참을 용기가 조금 생긴다.
p.209-10
난생처음 꺼내는 슬픈 이야기는 곧바로 유머가 되기 어렵다. 여러 번 말해보고 자꾸 다르게 말해볼수록 그 사건이 품은 슬픔의 농도가 옅어진다. 슬픔 속의 우스꽝스러움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성취는 반복적인 글쓰기의 자기 치유 과정과도 닮아있다. 나는 치유를 위해 글을 쓰지 않지만 글쓰기에는 분명 치유의 힘이 있다. 스스로를 멀리서 보는 연습이기 떄문이다. ... 자기 연미의 늪과 자기애의 늪 중 어느 곳에도 빠지지 않고 두 가지를 동시에 준다. 자신 말고 타인이 울고 웃을 자리를 남긴다. 그것은 사람들을 이야기로 초대하는 예술이다. 더 잘 초대하기 위해, 더 잘 연결되기 위해 작가들은 자기 이야기를 여러 번 다르게 말해보고 써본다. 먼저 울거나 웃지 않을 수 있게 될 때까지.
p.229
좋은 글은 장면을 선물한다고. 읽는 이의 마음속에 몹시 인상적인 이미지를 그려서 글을 내려놓고도 이야기가 자꾸만 떠오르게끔 한다고. 어떻게 해야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보여줄 수 있을지, 텍스트로 이뤄진 문장을 가지고 이미지의 세계로 가는 방법은 무엇일지 열심히 고민해보자고.
p.278
동시에 성립되지 않을 것같은 두 가지는 사실은 아주 가까이에 있다. 심지어 충돌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것이 사랑의 복합성이라고 느낀다. 이 동시다발적인 복잡함에 대해 말하는 게 문학일지도 모르겠다. 좋은 예술들은 모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그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그 사랑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고.
p.282
교사의 자리에 서서 나는 아이들을 매혹한 것들을 탐구했다. 무언가에 운명적으로 이끌리는 아이와 나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 그 세월과 함께 품이 넓은 교사가 되고 싶다.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한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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