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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 “일은 어떤 식으로든 사람을 훼손시킨다” : No.1 문화웹진 채널예스
막상 일을 하게 되면 스스로가 예상한 것들이 다 무너지는 것이 일이라는 것. 좀 체념적인 말일 수 있지만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2019.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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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에 나는 16살이었고, 어느 고등학교에 진학할지가 인생 최대의 고민이던 중3이었다. 어렴풋하게 그해 뉴스에서 자주 등장하던 단어들이 기억난다. ‘해고’, ‘노조’, ‘농성’, ‘강경진압’, ‘죽음’, 그리고 ‘쌍용’ 아빠 친구들 같은 아저씨들이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르고 <해고는 죽음이다>라며 구호를 외쳤고, 공장에서 먹고 자고 싸웠고, 경찰이 사람 얼굴에 최루탄을 쐈고, 어떤 이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것에 실패한 이들은 병원에 실려 갔고, 누군가는 다시 공장에 남아 먹고 자고 싸웠지만 결국 해산됐다. 무슨 일인 건지 잘 몰랐고, 자세히 알 생각도 없었던 나는 경찰이 사람을 패는 건 국사 시간에 민주화 운동을 배울 때나 봤는데 왜 저러지, 라고만 생각했다. 나는 뉴스 채널을 돌렸고, 다시 공부를 했고, 고등학교에 갔고, 해고가 왜 죽음일 수 있는지 알지 못한 채로 어른이 되었다.
그로부터 10년 쯤 지나 「9번의 일」을 읽었다. 주인공인 ‘그’는 세 번의 업무 촉구서를 받게 되는데, 그 때마다 주인공의 삶은 한 뼘씩 무너진다. 그렇게 무너져가는 삶 속에서 점차 이름을 잃다가 급기야 마지막 업무지에서 그는 78구역 1조 ‘9번’으로 불리게 된다. 이름과 함께 어떤 ‘인간성’까지도 함께 상실하게 된 그가 내리는 선택과 결정은 점차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되는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그가 짊어지고 있는 가족이라는 짐과 자꾸만 그를 실망시키고 배반하는 ‘일’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애초에 일 앞에서 그는 순진하게 믿고 버티는 쪽을 택했지만 모두가 그와 같은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는 일찌감치 타협하고 포기했다. 그리고 어떤 이는 연대하고 투쟁했다. 나는 후자에 속하는 ‘종규’라는 인물을 보며 2009년의 ‘쌍용’을 다시 떠올렸다.
주인공의 가까운 동료였던 이종규는, 한 집안의 가장이었던 이종규는 자기 몸에 불을 질렀다. 아마도 그는 전태일처럼 자신의 몸을 태워서라도 자신의 분노를, 회사의 부조리를, 사회의 비겁한 이면을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전태일은 그렇게 역사를 바꿨지만 이종규는 그렇지 못했다. 가장 가까운 가족인 아내는 남편의 죽음을 대가로 받게 되는 돈이 궁했다. 남은 이들은 가족과 동료의 죽음보다 시시각각 닥쳐올 살아남은 날들이 시급했다. 그리고 현실은 소설보다도 독했고 결과는 끔찍했다. 2018년 7월까지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와 그의 가족 33명이 목숨을 잃었다. 어쩌면 33보다 더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죽었을지 모른다. 복직은 되었지만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채로 살아가고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주인공은 깨닫는다. ‘종규를 홀로 있게 하고, 소리치게 하고, 결국 죽음으로 내몰았을지도 모르는 그런 것들을 이렇게 똑바로 바라봐야 하는 것이 이제 남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스스로를 마주해야 하는 벌을 받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며칠 전 삼촌을 만나고 돌아온 뒤 엄마는 울었다. 시작은 새로운 에어컨으로 바꿨냐는, 일상적인 대화였다. 문제는 그것의 출처였다. 회사에서 위로금 차원으로 준 것이라고 했다. 삼촌 회사의 사장이 바뀌었는데, 새로운 사장은 전에 있던 사람을 해고하고 자기 사람을 쓰고 싶어 했다고 한다. 그렇게 몇 명에게 사직을 권유했고 그 최신형 에어컨은 회사 차원의 미안함과 성의의 표시였던 것이다.
“눈앞이 깜깜했죠. 죽으란 소린가? 애들이 저렇게 어린데. 누나, 나는 더 일해야 해요.”
그날 삼촌의 말과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형용할 수 없는 단단한 결연함과 함께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두려움이 눈동자에 비쳤다. 다행히 원래 사장이 돌아오면서 다시 일을 하고 있지만, 만약 복직이 안 되었다면 삼촌은 어떻게 되었을까. 삼촌이 소설 속의 그처럼, 종규처럼, 한수처럼 되지 말란 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서는 일을 통해 개인의 자아를 실현한다고 배웠지만 학교를 벗어난 사회에서 과연 그것이 진실일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모두가 자신의 꿈과 사명만을 위해 일을 하지 않는다. 일이라는 것에는 사실 아주 많은 인생이 엉켜있고, 그것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삶의 절벽까지 개인을 내몰기도 한다. 그래서 ‘퇴사각’이 가벼운 유머처럼 소비되는 이 시대에 어떤 이들에게 해고는 죽음인 것이다. 온 몸을 불사르는 신체적 죽음일 수도 있고, 자신이 세워 올린 것들을 무너뜨리는 정신적 죽음일 수도 있다. 가정 경제의 파탄일 수도 있고, 꿈의 좌절일 수도 있다. 그렇게 해고는 반드시 죽음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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