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port" 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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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 내려간 마음

혜정

by grabthecloud 2020.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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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가끔 이렇게 말하곤 한다. “도대체 왜 너한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나는 너무 신기해.” 그러게, 생각해보면 나도 참 신기하다. 내가 지금껏 겪은 일련의 어이없는 일들이. 하나씩 나열하자면 이상하게 웃음과 눈물이 함께 터지면서 해학과 한의 정서가 공존하는 ‘그런’ 상황들이. 그리고 나는 줄곧 그건 다 내가 부족한 탓이라고, 나도 모르는 나의 실수나 잘못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야, 그건 절대 네 잘못이 아니야. 그 사람이 혹은 그 상황이 나빴던 거야.” 그리고 차근차근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가며 내 잘못이 아닌 이유를 설명해주기 시작한다.

 

 스무 살에 우리는 처음 만났지만 그녀도 나도 우리가 친구가 될 거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가끔 소설에서는 병에 걸린 유약한 부잣집 딸이 요양을 위해 시골로 내려오곤 하는데, 나는 그런 소녀의 이미지를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도대체 소설 속에 등장하는 그런 가녀린 소녀란 어떤 느낌일까. 하지만 나는 그녀를 처음 보고서 바로 알았다. ‘책에서 봤던 폐병에 걸린 소녀의 이미지란 바로 저런 거구나’ 하얗고, 맑고, 연약하고, 핏기가 없어 보여 건강이 조금 염려됐던 무채색의 조용한 그녀. 늘 들떠 있었고, 시끄러웠고, 계단에서 춤을 추다 십자인대가 끊어져 일면식도 없는 선배의 등에 업히기도 했던 나와는 아주 다른 결의 사람 같았다. 이것은 여전히 맞지만 틀린 서술이다. 이제는 우리가 많이 다르면서 또 많이 비슷하다는 걸 아니까.

 

 내가 자랑하고 싶은 그녀의 매력은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그녀를 아는 모두가 꼽을 만한 식상한 것 말고 다른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그녀는 내가 아는 유일한 ‘언어의 연금술사’다. 그녀가 선택하는 단어와 문장은 늘 예상을 뛰어넘는다. 얼마 전에 만났던 그녀는 또 연금술을 썼다. “그 선생님은 좀 특이해. 뭐랄까, 그 사람만의 ‘오로라’가 있어.” 어딘가 이상함을 감지한 내 표정을 보고 그녀는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정정을 한다. “아, ‘아우라’.” 그러면 우리는 같이 박장대소한다. 백전백승. 그녀의 연금술은 나의 웃음 지뢰다. 그녀와 헤어지고 집으로 오면서 사람에게 뿜어져 나오는 각기 다른 오로라를 상상했다. 극지방에 가야만 볼 수 있는 그 오로라를 내 곁의 사람에게서 볼 수 있다면. 그녀의 오로라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를 그리며 돌아왔다.

 

 우리가 친구가 아니라면, 나에서 그녀를 뺀다면 무엇이 달라질까. 사실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우리는 매일 연락을 하지도, 매일 얼굴을 보지도 않으니까. 다만, 그녀가 없다면 나는 좌절 앞에서 더 크게 좌절하고, 절망 앞에서 더 오래 절망하겠다. 어떻게든 내 잘못이 아니라고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으므로 나는 아주 오래 자책을 할 것이다. 나의 기쁨을 자기의 기쁨처럼 생각해 주는 사람도 없으므로 내 기쁨은 반으로 줄겠다. 나의 하루가 너무 무거워 어디에 좀 털어 놓고 싶은 날에 마땅한 상대를 찾지 못해 오랫동안 연락처만 들여다보고 있겠다. 그러다 물 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으로 잠들겠다. 남자의 몸과 섹스와 같은 뜨거운 주제를 나눌 상대가 없으므로 그 이야기는 내 머릿속에서 맴돌다가 푸시시 사그라져 절대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겠다.

 

 한 달 전 그녀의 생일 편지에 나는 이렇게 적었다. ‘너는 깊고 넓은 바다 같은 사람이야. 그리고 나는 그 바다에 가서 참 많이 울고 참 많이 위로 받았어. … 우리가 함께하지 않는 각자의 시간 안에서 분명 변해가는 것들이 있겠지만, 아주 중요한 건 변하지 않을 거야.’ 앞으로 나는 나의 인생에 또 어떤 ‘그런’ 일이 닥쳐올지 알 수 없다. 그저 온몸으로 당하고 겪어 낼 뿐. 다만 앞으로 살면서 몇 번은 더 그 바다를 찾게될 것임을 안다. 거기서는 마음껏 울고 내려놓을 수 있으니까. 내가 나로서 온전해져 다시금 팍팍한 육지의 삶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까. 그래서 어떤 날은 나만 알고 있는 그 바다가 나를 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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