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port" 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시절인연(時節因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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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 내려간 마음

시절인연(時節因緣)

by grabthecloud 2020.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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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 정민아. 나는 너고, 너는 나야. 나는 스물 아홉의 너지. 뜬금없이 오늘처럼 아무 날도 아닌 평범한 오월의 어느 날에, 아무 이유 없이 2년 전 스물 일곱의 나한테 편지를 쓰고 싶어졌어. 너는 늘 너한테서 편지를 받아보고 싶어 했잖아. 갑작스럽지만 그걸 오늘 한 번 해보려고.

 

 29세 현재의 근황부터 알려줄게. 나는 지금 중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어. 올해는 1학년 담임을 맡았고, 자유학년제라 애들은 ‘나만의 책 쓰기’ 수업 중이야. 그래서 요즘은 애들의 글을 읽고 있는데, 읽다보면 정말 많은 감정이 몰려 오고는 해. 한 명 한 명이 갖고 있는 개인의 서사를 읽어내려 가면서 14년 인생사 희노애락을 함께 하고 있으니 당연하지. 그 중에는 내가 아는 사건도 있고, 모르는 사건도 있는데 그것들을 통해서 이해할 수 없던 마음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도 했어. 그리고 항상 마지막에 드는 생각은 내가 너무 부족한 선생이고 어른이라는 거야. 나는 참 한결같이 하자가 있어. 하지만 한 가지 다행인 건, 그 하자를 보수하면서 날로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있다는 거지.

 

 사람은 역시 쉽게 변하지 않나봐. 아직도 5월이면 나는 <커피프린스 1호점>을 정주행 하거든. 여름 정서 가득한 그 드라마를 안 보면 이상하게 여름이 안 올 것만 같아서, 초여름의 밤공기와 함께 커피프린스라는 나만의 인륜지대사를 치러야 하는 것 역시 변하지 않았어.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공유는 정말 진리야. 매년 새로워, 매년 짜릿해! 물론 엄마랑 아빠, 오유정, 찐꼬도 잘 지내. 아빠는 여전히 무뚝뚝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따뜻하고, 엄마는 여전히 ‘살 뺄 거야’를 입에 달고서 단 거 있으면 내놓으라는 귀여운 협박을 하고, 오유정은 여전히 언니 같은 동생이고, 찐꼬는 여전히 아름다운 낭만고양이지. 송사리즈 역시 건재하고 말이야. 여전해야 할 것들은 이렇게 여전히 내 곁에 있어.

 

 변한 것도 한 가지 있네. 스물 아홉의 나는 다시 사랑을 믿게 됐어. 2년 전에는 사랑을 믿지 않았잖아. 남자는 결국 다 거기서 거기고, 거기서 거기인 사람과 만나서 하는 사랑 역시 거기서 거기라는 불신만을 맹신했지. 그 때의 너는 매일 사랑한다고 말하던 사람이 돌연 이름조차 꺼낼 수 없는 ‘볼드모트’같은 존재가 된 현실을 받아들이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었지. 내가 더 오래, 더 많이 사랑한 걸 수치로 여겼고, 그래서 사실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고 스스로를 속이기도 했던 거 같아. 하지만 사랑은 변해도 사실은 변하지 않잖아. 그건 사랑이었어. 그리고 오늘날의 나는 내가 더 오래, 더 많이 사랑했던 그때 그 수치스런 연애를 거름으로 다시 사랑을 해. 그 거름 덕분에 오늘의 사랑은 뿌리 깊은 나무야. 하지만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언제 어디서 만나 얼마나 사귀었는지는 말해주지 않을래! 다만, 혹시 기대할까봐 한 가지만 말해주면, 나로서도 아주 안타깝지만, 상대가 공유는 아니야. 그는 네가 사는 인간계에 살지 않아.

 

 편지를 시작하면서 아무 이유 없이 편지를 했다고 했지만 사실 스물 일곱의 나에게 편지를 쓰는 데는 이유가 있어. 2020년 너의 시작이 좀 비참했잖아. 오른쪽으로 누워서 울다가 베개가 젖으면 왼쪽으로 돌아누워 울었고, 왼쪽도 젖으면 베개를 뒤집어서 다시 울다가, 코가 막혀서 숨을 못 쉴 것 같을 때는 기어코 앉아서 마저 울던 밤과 낮을 나는 기억해. 내일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생각이 많았고, 생각을 안 하고 싶은데 안 할 수 없는 나를 보면서 생각을 안 하는 건 ‘안’ 부정이 아니라 ‘못’ 부정의 문제라는 걸 깨달았지. 그 때 차례로 벌어졌던 일들은 꼭 오목에서 내가 미처 발견 못 한 네 개의 흑돌 같았어. 막기엔 이미 늦어 버렸고, 그래서 그냥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했던 일들. 세상은 나 같은 소시민을 아득바득 이겨서 뭐 하려고 그렇게 나를 이겨먹고 주저앉게 했나 몰라. 그렇게 얼마간은 원망과 절망으로 똘똘 뭉쳐있었지.

 

 그리고 나는 그 시간을 지나 지금, 여기에 있어. 그냥 너한테 너무 많은 것을 걱정하지 말란 말을 해주고 싶어. 어차피 인생은 때로는 꽃같고 때로는 좆같으니까. 아가리를 쳐들고 달려드는 내일에 대한 걱정이 너의 오늘을 잡아먹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의 하루가 그렇게 희생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길 바라. 들어 마땅한 칭찬을 들으면 ‘아니에요’, 대신 ‘감사해요’라고 말하고,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를 소환해서 이불 킥 하지 말고, 내 탓이란 생각에 괴로우면 가끔은 뻔뻔스레 남 탓을 하고, 너의 모든 기쁨부터 슬픔까지 정확히 사랑해주고, 시트콤의 결말은 어쨌든 해피엔딩이라는 바보 같은 낙관론을 믿고, 질투 대신 사랑을 힘으로 삼아 살아갔으면 좋겠어. 너보다 2년을 더 살면서, 서른을 목전에 두고서 비로소 깨달은 인생의 진리는 어차피 될 일은 되고, 안 될 일은 안 되고, 갈 사람은 가고, 올 사람은 온다는 거야. 모든 일이 나에게 가장 좋은 때, 가장 좋은 방향으로 찾아 올 거라는 걸 믿으면 지금 너를 무겁게 짓누르는 것으로부터 조금 더 자유로워 질 수 있을 거야. 그렇게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27살의 네가 마음껏 당당히 좋은 계절을 누리고 만끽할 수 있기를.

_정민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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