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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에 대하여
스무살부터 나를 지켜봐 온 친구가 서촌에 갔다가 우연히 들른 #한권의서점 에서 책 한 권을 선물로 주었다. 소개글만 나와있고 어떤 책인지는 감춰져 있는 일종의 #히든북 인데 소개글을 보자마자 내가 떠올랐다고 했다. 선물하는 사람도, 선물을 받는 사람도 어떤 책이 들었는지 모른다는 것에서 낭만을 느꼈다면서. 소개글을 보자 나는 친구가 왜 이 문장을 읽고 나를 생각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나 역시 그 글이 나를 소개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바로 사람 때문에 울고 웃는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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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여러번 수치심을 느꼈는데 민간인 사찰을 당한 기분이었다. 내 맘 속에서 내내 달그락 거리며 끝내 버리지 못한 못난 마음들이 적나라하게 적혀 있었다. 민망할 정도로 정확한 통찰이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안도감이 들었다. 나만 이런 건 아니구나, 나만 이렇게 못된 건 아니구나, 하는. 적고 나니 이 안도감의 이유마저 참 볼품없어 보이지만 인정해야한다. 이게 나라는 걸. 이런 마음도 있다는 걸. 겉으로는 티가 잘 나지 않지만 내 안의 뿌리 깊은 자아혐오감이 이 책을 통해 한 꺼풀 가벼워진 느낌이 든다. 책 #나주에대하여 는 나에 대한, 우리 모두에 대한 #소설집 이다.
새 이야기
12/
나는 완성되지 않는 이야기들이 좋았다. 어떻게든 완성이 되는 형태여야 하겠지만. 완성처럼 보이는 미완성이어야 하겠지만. 이어지지 않는 이야기들이 좋았다. 이어지지 않는 것들은 끊어지지도 않으니까. 완성보다 미완성이 더 오래 지속되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종결되지 않은 것들이 내 주변을 행성처럼 돌고 있는 편이 더 행복하다고.
나주에 대하여
65/
나도 너처럼 우아하게 가만히 있어도 괜찮고 싶거든. 괜히 아무도 부추기지 않았는데 혼자 침묵에 불안해져 까불지 않고. 나도 누가 웃겨주면 웃고만 있고 싶다고. 내향 인간을 마주하고 속이 꼬인 사람처럼 또 그렇게 혼자 속으로 툴툴거렸다.
꿈과 요리
89/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와 에마뉘엘 카레르와 김연수와 한강이 한데 있는, 그러니까 그 모든 게 한데 있는 동시에 철저히 문학 서가에만 국한된 수언의 고요하고 단순한 도서관 동선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의 밑바닥이나 가장자리에 끄트머리가 살짝 들려 있는 아주 얇은 껍질을 살살 떼어내보면 거기에는 부러움이 있었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였다.
쟤 부럽다, 쟤는 좀 신기하다 같은 생각과 등을 맞대고 있는 생각은 결국 쟤가 보기에 나는 어떨까?였다.
97/
되고 싶다고 해서 반드시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그런 일은 아무에게도 없으며 자신 역시 똑같다고. 잘하면 되겠지만 잘해도 안 될 수도 있는 거라고. 될 때까지 하겠지만 결국 안 되었을 때 누구의 탓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누군가는 그렇게까지 비장한 게 우습다고 할지 몰라도 그래야 했다. 자신을 싫어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한 것까지만 후회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107/
솔지를 보면 항상 정반대의 마음이 꼬리를 물어서 마음이 복잡해졌었다. 그애를 무시하고 싶은 마음은, 쟨 어쩜 저럴까?하고 궁금했던 마음과 맞닿아 있었다.
111/
친구가 되어가지고 축하도 제대로 못해줘서 미안해. 지나고 보니 그게 제일 걸렸어. 나는 너를 언제나 부러워했고 좋아했는데... 우리 친해진 오 년 동안 부러움보다 좋아함이 앞섰다고 생각했는데. 너한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부러움이 먼저 튀어나가는 걸 보고 나도 나한테 충격받았어. 나 진짜 별로구나.
근육의 모양
122/
처음 해보는 도전이나 시도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후회나 두려움처럼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었다. 처음 해 보는 것이지만 여러 번 해본 사람처럼 능숙하게 하고 싶다는 사춘기적 마음, 다른 사람들에 비해 뒤처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 해야 할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혼자 엉뚱한 짓을 해서 우스꽝스러워지고 싶지 않다는 절박한 마음 같은 것 때문에 뭔가를 한다는 건 정말이지 부담스러웠지만, 그럼에도 재인은 '한다'와 '하지 않는다' 사이에서는 '한다' 쪽을 택했다. 결과적으로는 무조건 남는 게 있다고 믿는 편이었다.
132/
나는 무시할 수가 없어. 편한 대로 생각하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가 않아. 그 사람은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이고 그 사람이 자기 모양을 바꿀 때마다 내 마음의 모양도 바뀌어. 따라서 싫었다 좋았다 하게 돼. 그게 너무 힘들어. 다른 사람이 내 모양을 바꾸는 걸 더 보고 있을 힘이 이제 나에게는 없어.
149/
재인은 그 환대의 감각에 민감했다. 과거의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했었지. 내 기준이 뭐든 간에 나를 좋아해주는 태도 하나만으로 그 사람을 와락 좋아하고. 누가 나를 사랑하는지 아닌지, 그게 너무 중요했던 시절이 있었다. 사랑받는 게 중요해서 상대방의 표정만 살피고 자신의 표정도 비슷하게 지어보려고 있는 힘껏 노력했던 시기가. 내가 누구를 사랑하는지 아닌지가 중요한 지금과는 정반대의 생활방식이 재인에게도 있었다. 시간이 흘러 그 태도를 서서히 철거하며 재인은 그건 자신의 생존 본능에 가까웠던 거라고 짧게 결론지었다. 변명할 필요는 없었다.
척출기
162/
아냐, 그냥 사람이라 그래. 사람은 사람을 지치게 하잖아. 뭐가 어때서라기보다 사람을 대하는 건 언제나, 가끔 지치는 일이잖아.
170/
타인이 가장 사랑스러울 떄는 순수하게 '저 사람을 모르겠다'는 마음이 가장 클 때가 아닐까. 막연하게 그렇게도 생각해보았다.
한 사람이 하나의 세계라서, 가끔 너무 무섭지 않니? 그것은 어느 날엔가 희재가 했던 말이었다. 중얼거림에 가까운 말.
181/
나는 나를 지켰어. 최선을 다해 그렇게 믿고 싶었고 그것이 최선이라고도 믿었다. 너라는 총체적인 세계보다 내 오른 귀의 편협한 청력의 세계가 중요해. 아픈 게 지나가고, 그 아픔의 무늬를 지닌 어떤 사람이 되었을 때 다른 아픔의 무늬를 알아보는 일에는 최선을 다하겠지만. 아픔의 한복판에서 발을 구르는 채로 다른 사람 곁에 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너무 가까이가면 머리채를 잡혀 함께 가라앉을 것이고 너무 멀찍이 서서 그의 이름만 반복해 외치는 건 그에게나 나에게나 무력하다. 그러니까 우리, 나중에 만나요. 나중에 못 만날지도 모르지만 나중에 만나요. 영은은 처음으로 결정짓지 않은 관계를 결정지었다.
정체기
186/
그런 사소한 것들에 한 인간의 성격이 얼마나 좌우되는지, 아니면 작은 일 하나하나를 문제 삼는 성격 탓에 그런 사소한 것들이 전부 문제로 다가오는지 가늠하는 시간이 내 하루의 절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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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
안도하는 표정. 나는 늘 상대방의 얼굴에서 그런 표정을 찾으면 마음이 놓이곤 했다. 상대를 편안하게 만들었다는 성취감은 내 안의 유능감을 고취시키고 상대방에 대한 호감도를 상승시켰다. 상대가 내 맘에 들든 맘에 들지 않든 그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상대의 마음에 드는 일. 그게 중요했다.
192/
저는 아무도 상처주지 않아도 알아서 상처를 받는 능력이 있어요. 그리고 그 상처를 무시하거나 덮어놓지 않고 내내 뚫어져라 바라보는 습관도 있고요. 아주 최악이죠?
쉬운 마음
240/
선배, 저는요...... 사실 사람들이 좋아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리고 그 사람들이 저를 좋아한다는 게 좋아요. 이런 걸 좋아한다는 사실이 너무 촌스럽고 의존적이고 속이 빈 것 같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서 그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면서도 가끔 이렇게 털어놓고 싶어져요. 저는 누굴가를 좋아하고 누군가가 저를 좋아하는 일이, 몹시 중요해요. 한없이 그쪽으로 몰두하면 좋지 않을 걸 알아서 계속 경계하고 그 외의 것들로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해도...... 제가 하는 그 모든 일의 밑바닥에는 끈질기게 그 생각이 들러붙어 있어요. 본령처럼요.
침묵의 사자
277/
듣는 순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것이 나에게만 슬픈 일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었다.
나에게는 이렇게 괴로운 일이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때엔 아무렇지 않게 되겠지. 내가 한 달간 온 신경을 쏟았던 일이, 정체를 궁금해하고 알지도 못하는 얼굴을 향해 저주한 일이. 나의 불행이 아주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남들이 들으면 헐 진짜? 그랬어? 하고 놀라겠지만 정작 말하는 사람은 그 무구한 놀람의 목소리 때문에 한층 더 쓸쓸함을 감추게 될 만한 이야기.
해설 - 마음 이론
292/
'타인의 마음'은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장소다. 이곳은 때로 천국이고 자주 지옥이다. 가고 싶어서 안달나게 만드는 곳일 때도 있고, 끔찍하게 벗어나고 싶은 곳일 때도 있으며, 그보다 더 많은 경우에는 알고 싶지만 알 수 없는 미지로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303/
우리는 무엇인가를 왜 '잃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상실이란 무엇일까. 이별함으로써 관계가 중단되는 것은 잃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계속되지 않는 것일 뿐이다. 그만두는 것을 '잃는다'고 말하면 그만두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그만두는 것보다 애초에 시작하지 않는 것을 더 잘한 것으로 생각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마음의 상태를 알아가는 것은 더하기다. 정신화를 멈추지 않는 것이므로 더하기다. 관계를 현재의 모양으로만 판단하면 관계의 '사라짐'만 보이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 움직인 마음 상태를 본다면 어떤 사라짐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없다. 이별이 생겨난 것이다.
작가의 말
308/
나는 흠을 드러내면서도 흠이 없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한다. 그것이 나의 가장 별로인 점이라는 것도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현실에서도 은근 슬쩍 티를 내는데 그것으로 성에 차지 않아 소설로도 쓴다. 비뚤어지고 이상한 속마음, 좋아하면서 싫어하는 마음, 치고받고 싸워도 용서받고 싶은 마음을 쓴다.
못생긴 마음들을 쓸 때 나는 이상하게 행복하다. 그것을 솔직하게 쓸 수 있어서, 회피하지 않을 수 있어서 좋다. 나는 대체로 확신과 용기가 없는 채로 살아가는데, 소설을 쓸 때만은 용기가 생긴다.
310/
항상 그때의 마음에, 그때 가능했던 쓰기에 솔직하고 싶다. 그때의 최선에 대해 변명하고 싶지 않다. 나는 언제나 내 소설을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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