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개인적으로 ‘감성’이 붙는 말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감성 술집’, ‘감성 카페’, ‘감성 사진’, 그리고 ‘감성 에세이’. 특히 ‘감성 에세이’는 도대체 무슨 에세이인 걸까? ‘그냥 에세이’와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나는 ‘감성’이 붙으면 뭔가 오그라들고 느끼하고 조금은 거북한 느낌이 강하게 든다. 이 책은 초장부터 그런 것에 대한 거부감이 드러나 좋았다. ‘감성이 흘러넘치는 느끼한 글로는 내 진심을 전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쩔 수 없이 차오르는 감성에 판단력을 잃어 불쌍한 귀뚜라미를 잇는 명작을 쓰지 않으려고 책의 제목을 <안 느끼한 산문집>으로 미리 정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설치한 이 덫에 걸맞게 이 산문집은 느끼하지 않고 아주 담백하다. 이리저리 군더더기가 없다. 내용도, 형식도, 작가의 태도도.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분명한 강단이 글 너머에서부터 느껴져 아주 편안히, 그리고 단숨에 읽었다. 이슬아 작가에 이어, 그녀와 비슷한 이름을 가지고서 비슷한 글을 쓰는 듯 보이지만 분명 독보적인 강이슬 작가를 좋아하게 되었다.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밑줄
-아무리 많은 걸 손에 쥐고 있어도, 사랑하고 있지 않아서 나는 자주 공허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사랑 하나만 할 때는 가슴이 벅차 힘들 정도였는데 이제는 나에게 그런 날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믿기가 어려웠다.
-‘너는 왜 내 마음을 모르냐!’보다 더 속상한 경우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훨씬 속상한 ‘너는 내 마음을 알면서도 그러냐!’가 있었다.
-내 탓이 아닐 때는 내 탓을 하지 말자. 내 탓일 경우에는 내 탓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애써 찾아 탓하며 정신 승리를 하자. 가만히 있어도 나를 까고 밟아대는 세상에서 나까지 자신을 코너로 모는 것은 너무 가혹하니까. 나라도 제대로 각 잡고 서서 내 편이 되어주는 것이 정신 건강에 이롭다.
-사랑했던 연인에게 헌신하고 헌신짝이 되어버린 어느날, 꼰대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혓바닥이 너덜너덜해진 날, 믿었던 친구가 내 뒷담화 하는 장면을 포착한 날, 몇 달간 고생한 프로젝트가 엎어진 날, 아무튼 그런 종류의 날이면 어두운 방에서 자책하며 굴을 파는 대신 세상 비장한 얼굴로 “나는 존나 짱이다!”를 되뇌자. 왜냐하면 그럼에도 나는 틀림없는 존나 짱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비밀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오가는 바에서 내 짝사랑이 잔뜩 하찮아지는 느낌은 제법 괜찮았다. 어스름한 바깥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싱싱한 벚꽃은 그깟 봄비 따위에 떨어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행이었다. 내일부터는 벚꽃의 분홍에도 속상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내가 사랑하는, 내가 사랑했던,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미워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동시에 미워하기. 사랑받으며 미워하기. 한때 서로 사랑했음을 기억하는 가운데 미워하기. 부디 접점이 없어야 할 ‘미움’과 ‘사랑’ 두 단어는 언젠가 기어이 만나 하이파이브를 치고야 만다.
-너무 사랑하기에 서운하고, 서운하다 보니 밉고, 미워해서 미안하고, 미안하지만 미워하지 않을 수 없는 시간들을 어찌할 바 모르고 보낸다.
-사랑하지 않으면 이렇게 미워할 일도 없을 테고 나는 아프지도 않을 텐데 내 마음은 쓸데없이 물렁하고 담벼락도 하찮아서 늘 아무나 마음에 들이고 듬뿍 사랑에 빠져 괴로운 결말을 보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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