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해변에서 주은 쓸모없는 것들
P.18-9
표면적인 것만 보려고 하자. 함의가 있다고 넘겨짚지 말자. 함의를 찾으려고 애쓰지도 말자.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걸로 알자. 다른 사람의 속을 파헤치려는 걸 그만해야 한다. (...) 그러니까 거리를 두자. 어차피 지나가는 사람이니까 지나가버리면 그만이다. 진짜 삶은 진짜 관계를 맺는 사람과 나누면 된다...
P.24
나는 좁게 살아간다. 비밀 첩보원처럼. 들키지 않으려고. 그래서 계속 촌스럽게만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P.38
그것들은 실현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지만 당장은 모든 게 실현될 것처럼 말한다. 그럼에도, 어쩌면 그 때문에, 그에 대해 떠들어대는 일은 희한한 기쁨을 준다.
작정기
P.108
물론 그것은 물리적으로는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나는 물리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는 편이라서, 게다가 물리도 이 세계에 대해 완전히 다 아는 건 아니지 않나 싶기도 해서, 그런 확신이야말로 어떤 것을 이해하는 일에서 더 멀어지게 할 뿐일 테니까,
P.115
오래 쉴 수 없었으므로 멀리 떠날 수도 없었다. 우리는 시간을 쪼개아 다가올 삶을 계획했다. 그리고 그 계획대로 하나씩 해나갔다. 그런 게 삶의 기쁨이었다.
그런 나약한 말들
P.131
다 까먹으면 어때. 그때는 또 다른 걸 하면 돼. 지나간 일은 떠올릴 시간도 없이 정신없이 살면 돼. 정은은 뒤늦게 그 말을 곱씹어 보았다. 정신없이 사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살아간다는 것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가 않았다.
P.142
정은은 선생님의 그런 나약한 말들이 좋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추잡한 감정까지도 모두 교환했다. 어린 학생들을 욕하고, 직장 상사를 욕했다. 누구를 얼마나 미워하는지, 그들이 어떤 식으로 망해버렸으면 좋겠는지 마구 떠들어댔다. 어쩌면 둘 사이에 교집합의 세계가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는지도 몰랐다. 두사람은 멀기 때문에 가까웠다.
마음에 없는 소리
P.167
우리가 불행을 극복하는 방식은 태연해지는 것이었다. 낫는다는 것을 믿고 그 미래가 이미 도래한 것처럼 굴기. 그렇게 하면 반복되는 불행들을 점점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었다.
내가 울기 시작할 때
P.198
너는 여러 마음들의 집합체 같은 거라서.
P.220
이 달달함 때문에 살고 싶은 거냐고 물어서 차가운 단맛을 침으로 녹이며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나는 맹물을 들이켜면서도 살아있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자살은 아니었다.
사랑하는 일 (2021 젊은작가상 수상작)
P.235
하지만 정말 고맙기도 했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나니 더욱 그랬다. 곱씹을수록 단맛이 배어나는 쌀알처럼 그 마음은 점점 진해졌다. 진심이라는 건 형식에 뒤따르기도 하는 법이니까.
P.250
나는 늘 끝나는 순간에 대해 생각한다. 영지와 나의 관계가 끝나는 순간에 대해 생각할 때도 많다. 바라는 끝이 있어. 내 이야기는 이렇게 끝났으면 좋겠어, 하고 기대하는 장면들.
나는 아주아주 행복한 사람으로 죽을 거야. 아무도 그걸 못 막을 거야.
P.252-3
가족들을 사랑하는 건 이미 주어진 일 같은 거였는데, 그 사랑을 이어가는 일, 계속해서 사랑하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무조건적인 사랑 같은 건 없으니까. 내가 영지를 계속해서 사랑하는 일이 가능한 것은 우리가 합의한 일종의 공동선을 향해 함께 나아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매일 다른 사람이 되고 매일 사랑하는 일을 한다.
공원에서 (2022 젊은작가상 수상작)
P.259
좋아하는 장소가 생긴다는 것은 마치 인생에 경력이 쌓이는 듯한 기분이어서 한편으로는 뿌듯하기도 했다.
P.270
하지만 나중에는 아무렇게나 생각하도록 그냐ㅑㅇ 내버려두었다. 그렇게 체념하기가지 힘들었는데 체념하고 나니까 힘든 줄도 모르게 되었다. 그게 정말 나빴던 것 같다. 그게 나를 견디게 해준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다른 식으로 나를 망치는 것이었다.
P.271
속담도 일종의 일반화니까. 남자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왔고 여자들은 여자 일반으로 살기를 강요당했다.
P.281
문득 나는 내가 사는 걸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처음에는 너무 뜬금없고 이상한 감정처럼 느껴졌는데 점점 선명해졌다. 뜻대로 된 적은 별로 없지만 나는 사는 게 좋았다. 내가 겪은 모든 모욕들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극복해내고 싶을 만큼 좋아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사는 건 좋다. 살아서 개 같은 것들을 쓰다듬는 것은 특히나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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