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port" 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수취인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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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 내려간 마음

수취인불명

by grabthecloud 2020.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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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날 확신했어. 너랑 이렇게 헤어지고 나서도 나는 참 잘 살 수 있겠다고. 너 그날 그 검정색 셔츠 입고 왔잖아. 백화점에서 피팅한 거 보고 내가 엄청 칭찬해서 바로 샀던 거. 너한테 정말 어울렸고 나도 너무 좋아하는 스타일이었어. 나는 원래 진짜 좋은 건 진짜 좋아해주잖아. 근데 그 옷을 그날 거기서 볼 줄은 몰랐네.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지. 중요한 건, 그날 그 옷이 하나도 안 멋져 보였다는 거야. 멍청한 표정으로 고장 난 라디오처럼 바보같은 소리만 하고 있는 너한테 그 옷은 정말 안 어울렸어. 그래서 나는 확신한 거야. 나도, 너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날 또 비가 왔잖아. 세상은 비련의 여주인공 분위기가 가득했지만 나에게는 파라솔 같은 우산이 있었어. 나는 뽀송하게 집으로 돌아가면서 너와 관련된 모든 걸 지웠어. 씩씩한 발걸음으로 집에 가서 발랄한 리듬으로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지. 엄마가 나를 보고 왜 오늘 초콜릿 안 가져갔냐고 묻더라. 모양이 이상해서 도저히 남자친구 못 주겠냐면서. 나는 그게 원래 그런 모양이라고 말하다가 그만 울어버렸어. 집까지는 어떻게 잘 왔는데 나는 거기서 무너진 것 같아.

 나는 이제 확신을 못하겠어. 300일 중에 마지막 30일이 너무 거지같아서 우리의 서사를 추억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그건 나의 자만이고 오만이었나 봐. 가끔 네 270일의 다정함이 생각나. 네 다정함이 병이 됐나봐. 나에게도 이별을 준비할 시간이 있어서 너처럼 조금씩 감정을 소거하고 조금씩 뜨뜻미지근해졌다면 좋았을 텐데. 나는 낙하산도 없이 맨몸으로 추락한 기분이었거든. 그 결과 내 마음은 산산조각이 났고 그 파편들은 여전히 뾰족해. 지금도 그 조각들이 나한테만 들리는 이별의 소리로 덜그럭, 덜그럭 거려. 그래서 나는 이제 야비하고 비겁하게 사랑해보겠다는 얄팍한 다짐을 했어! 하지만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또 불나방처럼 사랑에 뛰어 들고 있겠지. 어쩌겠어, 나는 사랑에 있어 달리 요령이 없는 사람이야. 그리고 결론적으로 나는 이런 나를 차마 미워할 수가 없어. 가끔은 내가 기상천외 우여곡절이 많지만 어쨌든 결론은 해피엔딩인 시트콤 주인공 같기도 해. 인생에도 장르가 있다면 분명 내 인생은 시트콤이거든. 이렇게 생겨먹은 나는 내가 데리고 살려고. 굳이 억지로 이 산산조각들을 붙이려고 애쓰며 불가능에 갸륵한 기대를 걸지 않으려고 해. 앞으로 어떡하지, 싶었는데 그냥 이대로 잘 살면 돼.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으니까.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 수 있으니까.

 

-너는 나보다 아주 조금만 더 못 살기를 바라면서, 애정을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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