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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gm. 파라다이스–티맥스)
“왜 그렇게 쳐다 봐?”
“그냥… 신기해서요.”
“뭐가?”
“제 마음에 비상벨이 울리면 언제나 선배가 나타나는 게요.”
“비상벨? 불날 때 올리는 그런 거?”
“네”
“시켜 줘, 그럼.”
“네? 뭘요?”
“금잔디 명예 소방관.”
나의 열여섯 봄은 <꽃보다 남자>가 활짝 피었던 시절이다. 나도 금잔디가 될 수 있다는 사춘기 특유의 비합리적 신념으로 금잔디의 모든 것을 따라했고, 운명적으로 마주할 나만의 지후 선배를 대비했다. 나는 구준표보다도 지후 선배가 좋았다. 이성의 외모 조건으로 ‘무쌍’을 절대 포기 못하는 나에게 구준표의 쌍커풀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너무나 부담스럽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지후선배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나 역시도 비합리적 신념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더는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렇게 지후 선배에 대한 환상이 꺼져 갈 무렵, 지후 선배는 나타났다.
**. 그녀의 이름은 **이다. 우리는 스무 살에 대학 동기로 만나 거침없이 캠퍼스를 쏘다녔다. <대학 친구는 겉 친구 / 고등학교 친구는 평생 친구>가 마치 표어처럼 전해지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나에게 응급 상황이 생기면 바로 달려와 주는 나만의 명예 소방관이 바로 **이기 때문이다. 내 마음에 비상벨이 울렸던 첫 번째 사건은 일하던 학원에서 성추행을 당했을 때였다. 나는 학원을 뛰쳐나와 **이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녀는 늦은 밤이라는 시간적 배경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달려왔다. 그리고 헐레벌떡 달려온 그녀의 손에는 칼심을 뺀 빨간색 커터 칼이 들려있었다. 그날 내 친구의 그 여전사적인 기개를 절대 잊을 수가 없다.
나 역시 그녀가 부르면 달려갔다. **이는 첫 번째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난 뒤 길 한복판에서 짐승처럼 울었다. 나는 다 큰 성인이 번화가의 중심에서 그렇게 우는 것을 처음 봤고, 다른 사람들도 그런 건 처음 봤는지 모두가 안 보는 척하면서 다 봤다. 사실 처음에는 좀 창피했고 나도 그냥 행인인 척하고 싶었지만 몇 분 후엔 함께 오열했다. 나는 앞에 있는 사람이 울면 반자동적으로 따라 우는 요상한 습성이 있는데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 그날 나는 **이의 울음에서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친구의 사랑이 죽어가던 날에 다 큰 성인 두 명이 길에 서서 미친년 소리를 들으며 광광 울었다.
우리가 친구로 함께해 온 역사에는 찬란한 순간들 또한 무수하다. 하지만 기쁜 일을 같이 기뻐했던 날보다 슬픈 일을 같이 슬퍼했던 날이 더 선명하다. 1인분의 슬픔도 버거운 와중에 굳이 타인의 슬픔까지 떠안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 스무 살 이후 ‘나도 이제 어른이야’를 입에 달고 살면서 내렸던 어떤 결정은 ‘자랑’이었고, 어떤 결정은 ‘수치’였지만 그 대부분의 결정에 **이의 크고 작은 영향이 있었다. 자랑이었든, 수치였든 간에 그 중요한 순간들을 함께 해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내 마음에 비상벨이 울리면 명예 소방관이 언제든 달려왔다는 것이, 언제든 달려온다는 것이, 언제든 달려오겠다는 것이 나를 용감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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