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32
우리는 우리만으로도 괜찮아야 한다는 믿음, 내가 끝내 망가지지 않을 거라는 믿음 같은 걸 지키느라 지독한 멀미를 앓긴 했지만, 그 믿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나를 지켜냈고 그 와중에 나는 엉망인 마음이 어떤 건지 조금은 이해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 것 역시 누구나 갖게 되는 건 아니었다.
p.47-48
내가 불안하고 두렵고 버겁단 이유로 효원을 다그치곤 했던 거나, 왜 나 같지 못하느냐며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마다 경멸하던 것도. 나는 언니이자 효원의 예비 엄마처럼 굴었떤 게 틀림없고, 나 같은 언니를 두는 일은 어떤 일들을 자꾸 실패하게 만들었을지 모른다. (...) 언니로 산다는 건 무얼까...
p.49
한동안 효원은 늦은 밤 느닷없이 언니, 하고 말을 걸면서 글썽거렸다. 효원은 언제나 혼자서도 잘하고 싶어서 울었다. 자기가 울고 싶은 날 효원은 나를 언니라고 부르고 나는 효원의 이름을 불렀다. 어쩌면 먼저 산 여성은 뒤이어 태어난 여성의 이름을 불려주려고 언니가 되었는지도 몰라서, 나는 언니답게 조금 떨어져 앉은 채 그 애에게서 열심히 내 이름을 지웠다. 걱정이나 참견을 애써 누르며, 조언의 의미는 조언을 구하는 과정 중 네 마음이 정돈되는 데 있는 거라 말해주었다. 효원은 효원으로 살면 그만이라고.
p.55
하지만 나는 가라앉는 게 무서울 땐 버둥거리길 멈추러야 떠오른다는 걸 과정 중 체득했다. 떠내려가는 주제에 말하자면, 어떨 땐 애쓰는 걸 멈추는 것이야말로 삶의 영법일 것이다. 무엇도 버리거나 포기하지 못하던 내 기질 혹은 소망이 가슴속에서 부력을 형성했음을 어렴풋하게 인지한다. 그러니 결혼에 대해서라면 나는 비혼주의자가 아니다. 그저 애쓰지도 부정하지도 않고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둘 뿐이고, 지금의 나는 허무맹랑했던 소망과 무관하지만은 않은 곳으로 떠내려가는 듯 보인다.
p.59
그러니까 남성에게 확신을 갖기엔 여자로 사는 삶이 너무 위험하다는 것. 영훈 하나로도 내 세상은 충분히 망가질 수 있다는 것. 연애는 달뜬 감정이나 상호 끌림이 아닌 폭력과 권력의 각축장이기도 하다는 것...
p.64
다만 우리는 연인이고, 연인은 다른 누구보다 서로를 가장 궁금해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점점 서로를 덜 몰라야 해서, 언제부턴가 영훈은 굳어버린 내 얼굴이나 흥분한 목소리를 그럴 수 있다고 여기고 다독여왔다.
p.66-67
아니 왜 화내는 새끼가 없어? 그렇게 엄청난 애정을 자랑하면서 여자들의 현실에 대해 한 마디도 않는 다정함이란 어쩐지 괴랄했기 때문이었다. (...) 이를테면 상대방의 눈에 내가 맺히고, 내 눈에도 상대방이 맺혔을 때야 나는 우리가 서로 반해 있다고 믿었다. 상대가 나를 눈에 담은 채로 세상을 본다면, 내가 직면한 차별이나 편견이나 폭력적인 상황들을 적어도 날 만나기 전보단 덜 몰라야 마땅했다. (...) 하지만 나에 관한 공부도 안 되어 있는 이에게 내 삶이 가닿을 리 없다는 건 자명했다. 무엇보다 나를 전공하려는 사람이 공통 전제가 다를 정도로 나를 몰라선 안 됐다.
p.68-69
다만 영훈에게 비범한 부분이 있다면 진심 어린 사과를 잘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노력한다는 점이며, 내게 비범한 부분이 있다면 사람에게 실망하다가도 매번 다시 기댈르 걸곤 한다는 점이라서, 우리는 서로의 비범함에 기대 지극히 평범한 연애를 이어나가고 있다. (...)
소설을 좋아한다. 그에 따르면 '연애 소설이란 사람은 결코 혼자서 성숙할 수 없다는 진실을 이야기하는 장르'이며 그건 결국 사랑의 속성이기도 하다. 혼자서도 성숙해지는 여자들, 혹은 더 성숙할 필요없이 이미 풍요롭게 사는 멋진 여자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게는 통하지 않는 진실이다. 나는 언제나 누군가에게 반하면서 시야를 넓혔고 그래야만 성숙해질 수 잇는 유의 인간이니까.
그리고 누군가로 인해 그런 진실이 쌓이면서야 나는 삶이 내게 던진느 여러 물음들을 내 나름대로 조금씩 해석해낼 수 있게 되었다.
p.73
비꼬는 말 한마디란 백 마디 칭찬보다 질겨서 꼭꼭 씹어도 넘기기 어려웠다. (...) 그때의 마음이 어땠는가 하면 뭐랄까, 그 마음을 상기하는 과정 중 다시 내 마음이 다칠 거 같은 그런 정도의 마음이었던 거 같다.
p.76
사람들에게도 너에게도 관대해져. 남의 호의나 권력을 즐겨. 타인이 아니라면 누리지 못할 무엇이 오거든 누려. 누려야 상상해. 상상해야 뭐라도 돼. 어차피 모두를 못 구하니 너부터 구해. 페미니즘이니 뭐니 가끔은 잊어도 돼. 모두는 실수해. 나는 네가 좀 행복하길 바라...
p.139-140
내가 한끝만 더 취약했다면 이 일을 할 수도 있겠구나 싶은 마음, 서빙만 해도 성희롱을 당하는 세상에서 어차피 당하는 성희롱에 돈을 받는 게 뭐가 어떻게 다른가 싶은 마음, 내 삶에 온갖 잣대를 들이대며 공짜 섹스를 원하는 남자들에게 지쳐 있던 마음... 그 마음을 아는 듯 손 닿는 곳에 유혹은 늘 놓여 있었고, 그것도 친절하고 논리적이고 집요하고 끈질기게 있었다. 세상은 오직 여성에게만 회복이 어려운 선택을 쉽게 권유하려 들었다. 내가 아는 어떤 남자 친구들에게도 그런 아르바이트 제안은 오지 않았다. 자신의 삶을 찾거나 돌파하도록 내버려 둘 뿐 누구도 그 애들을 흔들지 않았다.
선택지가 많을 때 정답을 고를 확률은 떨어진다. 정답률을 높이는 방법은 답을 아는 것뿐이다. 여서응로 사는 동안 일찌감치 겪은 나쁜 경험들로 미루어, 어떤 돈은 그 이상의 값을 분명히 치른다는 얄팍한 앎으로 나는 그런 유혹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런 건 성숙의 결과라기보다는 내가 우연하게 가진 조건들의 총합에 가까운 것이었다. 생득적으로 눈치가 빠르고 의심이 많은 성정이나 수상쩍으면 도망부터 가는 태도, 수도권 학교 재학으로 얻은 강사 아르바이트 기회나 위기를 인식하는 촉, 주머니가 가벼웠다 해도 배를 곯지는 않았던 상황이나 나를 향한 가족의 믿음 같은 게 내 선택을 도와주었다. 이전까지 나는 돈을 쉽게 벌지 않았어, 라는 자부심을 가졌지만, 나는 그저 그럴 수 있는 앎을 가질 수 있었을 뿐이다. 그 앎은 대단치도 않지만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삶은 생각처럼 균형 있게 이루어지지 않아서.
p.184
삶은 왜 그럴까. 왜 정당함조차 인간의 어딘가를 영구히 훼손시킬까. 사람은 왜 다친 걸 보기만 해도 저 자신이 다칠까. 제가 다치게 하면서도 다친 얼굴을 보고 왜 자기가 상처받을까. 제가 다쳤음에도 왜 자신을 다치게 한 상대가 다칠까봐 망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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