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port" 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내 몫의 부끄러움에 대하여
본문 바로가기
써 내려간 마음

내 몫의 부끄러움에 대하여

by grabthecloud 2020. 8. 15.
728x90
728x90
BIG

 

 

 

‘학교에서 절대 똥 싸지 말아야지’


 이제 스무 살, 대학교 새내기가 된 나는 생각했다. 더럽지만 고결한 이 다짐은 어떤 남자의 추태로부터 비롯됐다. 그 남자는 순진한 얼굴에 그렇지 못한 팔뚝을 가졌었다. ‘벌크업한 공명’이랄까. 나는 그를 짧은 시간동안 꽤 강렬하게 흠모했는데 어느 날 나의 사랑은 차게 식게 된다. 때는 2013년 3월 5일 D대 H관 J311호 <교육학개론> 수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OT는 출석 체크를 안 할 거란 약은 생각에 느긋하고 여유롭게 지각을 한 나는 유일하게 비어있는 맨 앞줄, 교수님 침이 직빵으로 튀는 자리에 앉았다. 지각인 건 알았지만 민망함은 어쩔 수가 없구나, 라고 생각하는데 내 민망함을 덜어줄 새로운 지각생이 도착했다. 훤칠한 그는 등장부터 시선을 압도했고, 몇 초 뒤 그가 유일한 빈자리인 내 옆자리에 앉게 될 거란 사실에 내적 환호를 질렀다. 교수님은 팀플에 대한 설명을 하셨지만 내 신경은 온통 그였다. <교육학개론>은 참 아름다운 수업이라고, 특히 제일로 아름다운 것은 그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그에게 무슨 짓이든 하고 싶었지만 아무 짓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내내 열심히 짝사랑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남자 화장실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아씨, 이게 얼마짜린지 알아? 어떻게 보상할 거예요?”
 “걸레 빤 물을 튀기면 어떡하냐고, 시발!”
 “아!!! 죄송하다면 다냐고!!!”

 

 짝사랑을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목소리는 물론 어조와 말버릇까지도 알게 되는 법이다. 아니, 그렇게 세세한 것까지 모른대도 그건 분명 그의 목소리였다. 청소 노동자 아주머니는 연신 고개를 조아렸고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옷을 보니 튀어봤자 고작 몇 방울 같았지만, 그는 터무니없는 세탁비를 부르며 이 옷이 얼마짜린지 아냐고 했다. 그래서 그게 도대체 얼마짜린지 나는 묻고 싶었다. 얼마짜리면 그런 안하무인의 태도가 가능한 건지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아주머니와의 친분도, 그에게 맞설 오지랖도 없는 나였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나는 용기를 낼 ‘용기’가 없었다. 아주머니는 돌아가는 그를 보며 깊고 긴 한숨을 내쉬었는데, 나는 그게 안도의 한숨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손자뻘 되는 어린 학생에게 망신 아닌 망신을 당한 아주머니의 뒷모습은 유달리 쓰리고 고달팠다. 그의 추태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몸집을 키우면 뭐하나, 마음이 꼬꼬마인데. 그리고 이상하게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추태를 부린 건 그인데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인지를 오래 고민했다. 내 몫의 부끄러움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이후에 나는 다짐했다.
1. 학교에서 똥 싸지 말 것 (변비인데 막혀도 내 똥을 뚫을 자신이 없고 그럼 그건 결국…)
2. 화장실을 이용한 뒤 한 번 더 돌아볼 것
3. 손 씻을 때 세면대 주변에 물을 튀기지 말 것
4. 틴트처럼 물드는 화장품을 조심할 것
5. 아주머니께 인사 잘 할 것
6. 외모에 속지 말 것

 

 그리고 그간 무심하게 지나쳤던 것들이 보였다.
 첫째, 청소 노동자분들의 휴게실이 따로 없어 화장실의 ‘청소도구함’을 휴게실로 쓰신다는 아주 어이없고 분통터지는 사실. 기본적인 인권조차 배려 받지 못한 채로 그분들은 너무나 큰일을 해주고 계셨다. 누군가는 아주 잠깐 머물다 가면 그만인 그곳에 오랫동안 남아서.
 둘째, 우리 과 과방에 아주머니가 자주 오시며 남자 동기들에게 스마트폰 사용법을 배우고 계시다는 사실. 애들이 아주 싹싹하고 친절하게 스마트폰 사용법을 알려주고 말벗도 되어드리고 있었다. 내 동기들이 참 멋있고 따뜻하고 속 깊은 애들이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셋째, 언제나 중요한 건 외면이 아니라 내면이라는 어머니의 큰 가르침.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으면서 뒤돌아서면 까먹는 교훈.
 내가 더 이상 그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그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않고, 내가 화장실을 깨끗이 쓰는 것이 아주머니께 얼마나 큰 득이 될지 알 수 없으나, 스무 살의 나는 이렇게 일단 용기라 말하기도 부끄러운, 아주 작은 용기를 내보기로 한 것이다.

728x90
728x90
BIG

'써 내려간 마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날은 간다  (0) 2020.12.27
아무튼, 죽음  (0) 2020.09.06
사건의 전말  (0) 2020.08.01
고양이와 고딩 <1> : 선준  (0) 2020.07.15
1과 2  (0) 2020.07.1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