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port" 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사건의 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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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 내려간 마음

사건의 전말

by grabthecloud 2020.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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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악한 나는 죽고 싶다고 할 때 살으라고 하는 무심함보다 '같이 죽을까, 그럴래?'라고 묻는 다정함이 더 좋아서 가끔 없는 계절을 데려왔다. -백가희, <당신이 빛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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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리진씨가 앞으로 잘 될 거라고 믿어요."
 "갑자기? 잘 하고 있으면서."
 "넌 할 수 있어."
 "엄마는 리진이 때문에 살지."
 "원체 긍정적이시잖아요?"
 “나는 자기가 밝아서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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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 했지만 역시다. 이번에도 기대한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녀는 잠시 침묵으로 그 순간을 일시정지시켰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쾌활해진다. 다시 가벼운 이야기를, 밝고 따듯하고 너무나 희망적인 이야기를, 한 치의 절망도 없는, 그래서 도저히 불가능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들숨과 날숨조차 거짓으로 긍정하고 낙관하는 자신이 정말 그지 같다고 자조하면서. 웃으면서 헤어지고 돌아선 뒤 무표정으로 돌아간다. 마스크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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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그녀가 무엇을 딛고 서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것을 알지 못한 채로 그녀에게 기대하고 의지한 뒤 제멋대로 실망했다가 다시 기대하고 의지하기를 반복했다. 그녀에겐 그럴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이 다분해보였다. 마치 비옥한 땅에서 자라 뿌리가 단단하고 가지가 길게 뻗은 나무 같았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그래도 되는 사람이었다. 가끔 자신의 이야기 끝에 인사치레처럼 ‘너는 요즘 어때?’라고 묻는 이들이 있었지만 그녀는 이야기 하지 않았다. 그녀는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슬픈 사람 둘이 된다.’는 한 소설가의 말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발 사람들도 그것을 알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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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에겐 잠시도 절망할 권리가 없었다. 그녀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역할과 그에 따른 역할 기대가 있었고, 그것을 해내지 못하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힘들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시시각각 고군분투 중이었다. 총성 없는 전쟁을 치르면서 그녀는 매일 새로운 치명상을 입었지만 아무도 그 상처를 알지 못했다. 사실 그녀조차도 알지 못했다. 그것은 환부를 알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녀가 죽은 뒤에 주변 사람들은 한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에게 그녀는 벼랑 끝에서도 벼랑 끝에 피어있는 꽃을 발견하고 웃으면서 돌아올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에야 비로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무엇을 딛고 서있었던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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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진아, 나보고 추도사를 하래. 진짜 웃기지. 제일 친한 친구로서 네 장례식의 추도사를 하라는 거야. 친구가 죽어가는 동안에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너무 잘 살아가고 있었는데. 나는 도저히 나를 네 친구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말이야. 이 우스운 추도사를 듣고 있어?
 사실 너를 원망했어. 이미 죽었는데 또 죽을 만큼 네가 미웠어. 네 욕을 엄청 했어. 그렇게 며칠을 멍하니 지내다가 네가 언젠가 아주 가볍게 지나가듯 했던 말을 생각했어. ‘죽는 게 뭐가 어려워, 사는 게 어렵지. 죽는 건 하나도 안 어려워.’ 너는 버티다, 버티다 그 안쓰러운 버티기를 그만둔 거야, 네 이름 앞에 덕지덕지 달린 짐들을 다 놓아버리고 이제는 훌훌 자유로워 진거야. 그치?
 리진아, 웃고 있는 네 얼굴만 보느라 나는 네 두 발이 어디에 서 있는지는 보지 못했나봐. 아니, 어쩌면 모른 척하고 싶어서 외면했던 건지도 몰라. 네가 벼랑 끝에 서있다는 걸 나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거지. 사실은 매일 밤 투신하고 있던 너를 몰라서 미안해. 이제는 누군가의 딸도, 누군가의 친구도, 누군가의 연인도, 누군가의 선배도, 그 누군가의 무엇도 아닌 곳에서 아주 이기적으로 편안하길 바라. 거기서는 너를 붙잡는 그 무엇도 없으니까, 설령 절벽이라도 투신이 아니라 비행을 할 수 있겠지. 그곳에서의 비행을 응원해. 가끔 꿈에서 보자,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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