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하지만 늘 내 가슴을 뛰게 하던 전주가 울려 퍼지고 곧이어 ‘찾아라 비밀의 열-쇠! 미로같이 얽힌 모험들’이라는 가사와 함께 노래가 시작되면 어린 시절의 나는 태일이와 아구몬이 사는 디지털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디지몬 친구들 (Let's go Let's go) 세상을 구하자 (Let's go Let's go)’라는 후렴구와 함께 나의 디지몬 역시 아구몬일 거라 확신했다. 그리고 상상했다. 반짝이는 커다란 눈과 작은 이빨을 가진 아구몬이 귀엽지만 어딘가 모르게 걸걸한 목소리로 “정민아-”하고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을까, 데빌몬처럼 무섭고 징그러운 디지몬이 나타나면 나를 위해 싸워주지 않을까, 그렇게 나를 지켜주지 않을까, 하고. 그러다가 만화는 해피엔딩으로 끝이 나고, 자라난 나 역시 더 이상 만화를 찾지 않으면서 더는 이런 상상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어차피 이것은 불가능한 환상이므로. 쓸데없는 망상이므로. 그렇게 고사리 손을 모아 어서 아구몬을 만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던 꼬마가 자라 아구몬을 찾지 않는 어른이 된 지금 구병모의 소설을 만났다.
내가 꿈꾸는 것이 환상임을 알고, 그래서 그것이 때로는 환상을 넘어 망상처럼 느껴지지만 ‘구병모식 환상’은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다. 그녀의 「위저드 베이커리」가 그랬고, 「심장에 수놓은 이야기」 역시 그렇다. 내가 새긴 타투가 나의 수호신이 되어 위기로부터 나를 구원해준다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몇 가지 삽화가 독립적인 이야기로 등장하다가 결국 하나의 이야기로 수렴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주인공 시미 역시 타투를 새긴다. 고민 끝에 반짝이는 별을 새긴 시미. 나이 든 중년이며 이혼을 한 뒤 하나뿐인 자식으로부터 거부당한 엄마인 시미가 오랜 고심 끝에 손목에 별을 새겼다. 그리고 타투샵을 나온 골목길에서 별이 부유하며 찬란하게 빛난다. 아마도 그 별은 앞으로 펼쳐질 시미의 인생도 반짝이게 할 것이다. 시미를 지켜낼 것이다. 그렇게 책을 덮고 난 뒤에 나는 잠시 멍하게 앉아 내가 새길 타투를 생각했다. 나를 지켜줄, 바로 그 타투를.
/밑줄
-그렇다는 것은 사람을 지켜준다는 행위가 반드시 누군가를 해함으로써 완성되는 게 아니라, 다만 그 사람을 지지하는 버팀목 같은 것도 포함하는 것이 아닐까.
-충동과 우연도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고 실제로 그것들이 자연이며 우주며 만들기도 했지만, 우리는 인간이니까요. 생각 많은 것도 일관성 없는 것도 당연합니다.
-당신은 살아오면서 어떤 호의와 … 얼마만 한 경멸과 때로는 악의를 만나왔기에, 자신을 지키는 부적을 온몸에 그릴 수밖에 없었을까요.
-실은 피부에 새겨진 건 자신의 심장에도 새겨지는 겁니다. 상흔처럼요. 몸에 입은 고통은 언제까지고 그 몸과 영혼을 떠나지 않고 맴돌아요. 아무리 잊은 것처럼 보이더라도 말이지요.
-중요한 건 사람들이 그만큼 간절하게 바라고 믿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내 몸이 어제와는 달라지기를, 나를 둘러싼 외부 조건이나 상황이 조금이라도 좋아지기를
-스스로가 빛나지 않는다면, 시미는 다만 몇 발자국 앞이나마 비추어줄 한 점의 빛을 보고 싶었다. 바라는 건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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