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port" 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구의 증명> 사랑해, 너를 먹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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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키우는 책

<구의 증명> 사랑해, 너를 먹을 만큼.

by grabthecloud 2022.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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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를 잃어버린 '담'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장례를 치르는 이야기
-최진영



p.23
끈기 있게 대답을 해주던 이모는 결국 화를 냈고 나는 울었다. 울면서도 모르는 게 죄냐고 물었다. 이모는 이렇게 대답했다.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 대답이나 설명보다 시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고. 더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데 지금 이해할 수 없다고 묻고 또 물어봤자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모르는 건 죄가 아닌데 기다리지 못하는 건 죄가 되기도 한다고.

p.63
담이 울면서 나를 먹는다. 저것이 눈물인지 핏물인지 진물인지 모르겠다. 저걸 다만 운다고 말할 수 있나. 자기가 지금 울고 있다는 것을 담은 알까.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까. 죽으면 다 끝인 줄 알았는데, 몸은 저기 저렇게 남아 있고 마음은 여태 내게 달라붙어 있다. 저 무거운 몸을 내가 가져가고 이 마음을 담에게 남길 수 있다면 좋을텐데.

p.65
하지만 기다림은 공장 문 앞이 아니라 구와 헤어질 때부터 시작되었다.

p.76
우리는 사귄다는 단어를 채우고도 그 단어가 보이지 않을 만큼 넘쳐흐르는 관계였다.

p.90
미래에 대한 내 근육은 한없이 느슨하고 무기력했다. 나의 미래는 오래전에 개봉한 맥주였다. 향과 알코올과 탄산이 다 날아간 미적지근한 그 병에 뚜껑만 다시 닫아 놓고서 남에게나 나에게나 새것이라고 우겨대는 것 같았다. 영영 이렇게 살게 될까봐 겁이 난다고, 담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절대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라고 담은 말해줬었다. 그런 말도 무언가를 참는 것이었다. 참으며 말하거나 참으며 듣거나, 참게 되거나 참게 하거나.

p.95
그 마음이 제일 중요한 거야. 그 마음을 까먹으면 안 돼.
걱정하는 마음?
응. 그게 있어야 세상에 흉한 짓 안 하고 산다.

p.106
걱정이 담긴 충고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때 내겐 그런 여유가 없었다. 타인의 말을 구기거나 접지 않고,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여유.

 p.172
나는 너와 있는데, 너는 나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니 네가 여기 없거나 내가 여기 없거나 둘 중 하나 아닐까 싶다가도, 고통스럽게 나를 뜯어먹는 너를 바라보고 있자니 있고 없음이 뭐 그리 중요한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있든 없든 그건 어디까지나 감각의 영역일 텐데, 나는 죽은 자다. 죽어 몸을 두고 온 자에게 감각이라니 무슨 개소리인가. 하지만 느껴진다. 나는 분명 너를 느끼고 있다.
 
작가의 말
나는 사랑하면서도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글을 쓰는 순간에도 ‘글을 쓰고 싶다’ 생각하고, 분명 살아 있으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버린다. 그러니 나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알 수 없지만, 사랑하고 쓴다는 것은 지금 내게 ‘가장 좋은 것’이다. 살다보면 그보다 좋은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르지만, 더 좋은 것 따위, 되도록 오랫동안 모른 채 살고 싶다.


집중하면 한 시간 반만에도 읽을 수 있는 얇은 책이지만 그것을 소화히는데는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이야기. 올해 들어 내가 가장 많이 운 이틀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구의 증명>을 읽는 시간이었다. 호불호가 분명히 갈릴 내용이지만 나에게는 극적으로 '호'였던 올해의 책.
내 눈물 버튼은 후반부에 등장하는 담이의 독백인데,
'너는 나를 왜 이토록 괴롭게 하니.
너는 나를 왜 이토록 고통스럽게 해.'
라는 부분이다.
구를 만난 이래 처음으로, 구의 시신을 먹으면서 담이는 괴롭고 고통스럽다고 고백한다. 구와 함께하면서도 참 지독히 힘들었지만 담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외치며 늘 함께하자고 했던 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했던 사람의 싸늘한 시신을 뜯어 먹어야 하는 비현실적 현실 앞에서 그녀는 비소로 무너진다. 맹목적으로 구를 사랑했던 담이의 현실에서 서글픈 비린내가 났다. 그리고 그런 담이를 볼 수밖에 없는 구의 애달픈 시선. 무겁고 더러운 몸은 본인이 가져가고 가볍고 순수한 영혼을 주고 싶던 구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나쁜 것은 내가 갖고 좋은 것만 주고 싶은 것이 사랑의 단순한 진심이고, 구는 죽어서도 담을 사랑했다.
제목 '구의 증명'은 관형격 조사 '의'로 인해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구를 주어로 해석하여 '구가 증명한 것' 혹은 구를 목적어로 해석하여 '구를/구에 대하여 증명한 것' 정도로. 나는 후자로 보았다. '담이 구를/구에 대하여 증명한 것'. '구'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왔다 갔다는 것, 세상의 폭력 속에서도 끝까지 버텼다는 것, 즉 '구'라는 존재 자체와 그 존재의 타당성을 기억하고,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담이밖에 없는 것이다. 그를 증명하게 위해 담이는 구를 먹는다. 그를 먹어 비로소 하나가 된 뒤 담이자 구로 천년만년 세상이 끝날 때까지 살아가는 것이 구를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구와 담의 사랑을 그대로 표현한 듯한 노래. 맨 뒤 작가의 말에 소개된 노래이기도 하다. 가수 이름이 '9와 숫자들'이고 노래 제목이 '창세기'이다.
나의 세상이 너로 인해 창조되었다는 것은 언뜻 낭만적이나, 네가 없으면 내 세상도 없다는 의미같아 절망적이다. 서로를 잃어 세상을 잃은 구와 담의 역사가 내 안에서도 유구히 흐를 것이다.

그대는 내 혈관의 피
그대는 내 심장의 숨
그대는 내 대지의 흙
그대는 내 바다의 물
그대는 내 초라한 들판
단 한 송이의 꽃
그대는 내 텅 빈 하늘 위
휘노는 단 한 마리의 신비로운 새
포근한 그 품 속에 가득 안겨있을 때면
기도해요 난 지금이 내 마지막 순간이길
그대 그 아름다운 미소 그 밖에 난 없어요
유일한 나의 세계
매일이 하루 같은 나의 꿈
그대는 내 아침의 볕
그대는 내 공기의 열
수억 광년 어둠을 뚫고
날 부르는 별
그대는 날 이끄는 길
그대는 날 지키는 법
수백만 년 정적을 깨고
날 흔드는 손
포근한 그 품 속에 가득 안겨있을 때면
기도해요 난 지금이 내 마지막 순간이길
그대 그 아름다운 미소 그 밖에 난 없어요
유일한 나의 세계
매일이 하루 같은 나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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